18. 알밤
새벽에 일어나니 비가 후두두둑 떨어집니다. 동산에 있는 밤나무가 꽃을 지렁이 모양으로 길게 피우더니 올해는 밤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마음먹고 일찍 일어났는데 나갈까 말까 망설여졌습니다. 밖은 아직도 캄캄합니다. 더구나 빗방울까지 떨어지니 다른 날보다도 더 어둡습니다.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뒤꼍으로 다가갔습니다. 주위가 온통 어두워서 밤을 찾아낼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불을 켜고 주울까.’
불 밝힌 것을 알면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올지 모릅니다. 너도나도 줍는다고 설쳐대면 곤란합니다. 형은 며칠 전부터 새벽에 일어나서 밤 줍기를 했습니다. 많이 모아서 장에 갔다가 팔았습니다. 공책과 다른 학용품도 마련했습니다. 아직도 돈이 좀 남았다고 며칠 전에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고모와 형은 부지런합니다. 집안일을 도우면서도 틈만 나면 무엇이든 열심히 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마련합니다. 호야도 좀 끼워 주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어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고모와 형은 할 일이 있으면 호야를 빼놓고서 몰래 상의합니다. 호야가 뭘 하려고 그러느냐 물어보면 항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버무리고 맙니다. 밤 줍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꾸미는 일이 있는 것 같아 며칠 전부터 물었지만, 시치미를 떼서 몰랐습니다. 결국은 나중에야 소곤거리는 소리를 엿듣고 알아냈습니다.
‘치 그렇게 비밀로 한다고 모를 줄 알고, 나도 하면 되지.’
마음먹고 시작하려는 날부터 비가 오니 낭패입니다. 살금살금 담을 올라가 뒷동산 밤나무 밑으로 갔습니다. 온통 주위가 캄캄해서 보이 지를 않습니다. 나무 가까이에 영진네 산소가 공동묘지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이런 날은 귀신이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평소에는 우리 남자 친구들의 놀이터로 이용되는 위쪽의 묘지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립니다.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밤을 주워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먼동이 트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빗방울이 점차 가늘어집니다. 가끔 ‘후드득 탁’하고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탁탁.’
갑자기 밤알이 내 앞에 떨어져 튑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소리 난 곳을 짐작하여 다가갔습니다. 손으로 더듬었습니다. 이윽고 밤알이 손에 잡힙니다. 두 번째도 잡힙니다. 크고 매끄럽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좋다고 소문난 밤입니다.
다음부터는 자꾸 헛손질만 합니다. 잡아 보면 돌멩이입니다. 빗방울은 소리 없이 떨어집니다. 잠시 후 먼동이 트면서 주위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살펴보면 찾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비가 오는 것은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이 말하는데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새벽에 아이들이 온다고 합니다. 밤 한 톨이 떨어지면 경쟁하여 재빨리 줍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위가 밝아지면서부터 호야는 신나게 밤알을 주웠습니다. 아람이 벌어서 밤새 쏟아졌습니다. 밤알들이 주위에 빨갛게 널려 있습니다. 누구라도 혹시 볼까 봐 호야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습니다. 손놀림을 빨리했습니다. 조그만 다래끼에 가득 채웠습니다. 작은 바구니를 가져왔는데도 많이 찼습니다. 모두 줍는다면 바구니 하나는 또 채울 것 같습니다. 생각대로 아침을 먹기 전까지 두 바구니를 채웠습니다. 살그머니 뒤편 닭장 뒤에 숨겼습니다. 집안 식구들에게 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저 밤으로 무엇을 할까? 팔아서 공책, 연필, 아니 과자나 사탕, 아니.’
무엇인가 해야겠는데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다음에 생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계속 비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비가 온다면 아이들이 밤을 주우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호야 혼자 많이 주울 수가 있습니다. 호야는 하루 종이 비가 내리기를 빌었습니다. 가끔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정말로 비는 하루 종일 내립니다.
점심때가 지나자, 아이들이 밤나무 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어? 밤이 많이 떨어져 있을 줄로 알고 왔는데 누가 벌써 주워 갔지?”
“글쎄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을 일찍 먹고 오는 건데.”
아이들은 투덜대다가 돌아가 버렸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 새벽에라도 온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다음날도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왔는데 이미 비는 그쳤습니다. 나무에 맺혀 있던 빗방울들이 가끔 바람에 후드득후드득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집니다. 어쩌다가 머리 위에라도 닿게 되면 차가움에 깜짝 놀라곤 합니다. 오늘은 더 많이 쏟아진 것 같습니다.
‘밤새 바람이 불어서일까요?’
어둡지만 어림짐작으로 손이 가는 곳마다 밤이 잡힙니다. 재미나서 무서움 따위는 잊었습니다. 발소리가 커지거나 소리를 내면 아랫집 욕심쟁이 누나가 올지 모릅니다. 벌써 한 바구니를 담고 또 한 바구니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며 발걸음을 옮깁니다. 가까운 밤나무 주위를 더듬고 대나무밭으로 옮겨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대나무가 흔들리고 잎들이 소리를 내며 맺혀 있는 물방울이 흩어졌습니다.
‘앗 차가워.’
몸을 부르르 떠는데 갑자기 저쪽의 대나무가 흔들리며 역시 물방울이 소리 내며 ‘후두 두둑’ 떨어졌습니다.
“어어.”
무엇인가 검은 물체가 갑자기 튀어나왔습니다. 호야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습니다. 외마디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그러자 상대편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고머니나.”
서로 한동안 멍하니 놀란 토끼처럼 서 있다가 호야가 말했습니다.
“정은아, 너 언제 왔니?”
“금방.”
“너는?”
“나도.”
먼동이 트면서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동네는 조용합니다. 다만 아래 아랫집 오 생원 기침 소리만 ‘쿨룩쿨룩’하고 들려옵니다. 가을은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