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요즘은 나는 20230604
‘어느새 포근해졌네.’
밖을 나서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입니다. 추운 겨울 집에서만 움츠리고 있을 수 없어 종종 밖으로 나왔습니다. 몸이 시켜서 하는 것은 아니고 마음 때문입니다. 마음이 몸을 위한다고나 할까요. 춥다고 이대로 방안에만 처박혀 있다가는 허약해질 것 같은 생각에 몸을 재촉했습니다.
‘뭐야, 게으름을 피운다고 뭐 나아지는 게 있겠어. 게으름도 병이라는데.’
날씨가 매섭게 추우니 매일 길을 걷는다는 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눈이라도 쌓인 날이면 나이 탓인지 몸의 균형을 잡는 일에 부담이 됩니다. 혹시라도 넘어진다면 젊었을 때와는 달리 고생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심심찮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은근히 걱정됩니다. 운동은 해야겠고 마땅한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수영할까, 헬스장에 갈까, 실내 운동기구를 사서 집에서 사용해 볼까.’
하지만 다 정해진 시간을 내야 하고 금전이 드는 일입니다.
며칠 전 학교 옆을 지나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눈 쌓인 마당에서 공을 차고 있습니다. 얼마나 뛰어놀았는지 추운 날임에도 겉옷을 벗은 채 놀이에 열중입니다. ‘저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걷는 대신 공을 들였습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놀이 공간이 있습니다. 어린이 놀이터 바로 옆에 나를 위해 만들어 놓았다고 착각할 만큼의 마당이 있습니다. 혼자 움직이기에 딱 좋습니다. 더구나 바닥에는 마루가지 깔려 있어 안전에도 무리가 없습니다. 통로를 제외하고는 사방이 무릎높이의 벽으로 둘러싸여 공을 차기에 좋습니다. 벽을 상대로 공을 차면 부딪쳐 되돌아옵니다.
처음 공을 찰 때는 지루했습니다. 같은 발길질을 반복한다는 게 재미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 이백여 번의 발길질을 했습니다. 헛발질이 날이 지날수록 줄어듭니다. 공을 겨누는 발길이 정 중앙을 향했습니다. 되돌아오는 공이 발 앞에 머물기 시작합니다. 몸놀림을 달리하고 발길질도 달리합니다. 선수들의 연습을 흉내 내기도 했습니다. 나도 아이들처럼 겉옷을 벗었습니다. 몸이 후끈 달아오릅니다. 땀이 등을 적시려 합니다. 날씨와 몸놀림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이삼십 분을 움직이면 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오늘은 십여 분 움직였는데 덥다는 생각이 듭니다. 날씨가 온화해진 이유입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눈에 띄게 연둣빛이 감돕니다. 앞산이 짙어 보입니다.
“뭐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밖으로 뱉으며 쪼그려 앉았습니다. 냉이가 구석진 모서리에서 노란 햇빛을 받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었습니다. 매화나무의 꽃 몽우리가 흰 테를 둘렀습니다.
‘춥기는 해도 봄바람이군.’
점심을 먹은 후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연못가의 버들가지에 물이 올랐음이 틀림없습니다. 긴 줄기를 따라 수줍게 연둣빛 잎을 드러냅니다.
매화가 피어나고 개나리가 눈을 뜨고, 민들레가 해를 엿봅니다. 벚꽃이 앵두꽃이, 목련이 사이좋게 머리를 들었습니다. 진달래가 수줍음을 보입니다. 영산홍이, 이팝나무꽃이 조팝나무꽃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에 질세라 뒤를 이어 장미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피고 지고 따라서 피고 지고 계절의 흐름은 속일 수가 없나 봅니다. 말은 없어도 눈치는 알아서 어김없이 제 예쁜 모습을 자랑합니다.
‘백만 송이의 장미’ 노래 가사도 있듯이 집 앞의 공원에도 백만 송이의 장미가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옛날의 고정된 품종에서 벗어나 다양한 품종, 다양한 색깔, 다양한 모습으로 뭇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빼앗고 있습니다. 내가 공에 정신을 파는 사이 이들은 알게 모르게 유월을 준비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마음이 급한 장미는 오월에 꽃잎을 활짝 드러냈습니다. 성급하기도 하지, 자랑이 앞서는 것 같아 꾸지람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날씨 탓이라 여기겠습니다. 분명 환경의 변화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온난화의 현상입니다. 식물들이 내 생각보다 일찍 앞을 다투어 선을 보입니다.
새벽에 공을 차고 집으로 오는데 화단에 낯선 꽃잎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코스모스입니다. 정말로 꽃이 피었습니다. 한 송이인 줄 알았는데 길을 따라 드문드문 몇 송이가 점을 찍듯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가을 코스모스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유월 초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아직은 봄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 여기는데, 아니 여름의 초임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가을 코스모스라는 말이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공을 만지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겨우내 발끝에서 놀던 공이 종종 쉴 틈을 찾고 게으름을 피웁니다. 대신 내 발걸음을 길로 공원으로 고궁으로 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요 며칠은 백만 송이 장미에 미쳤습니다. 코가 즐겁고 눈이 즐겁습니다. 사진을 찍는 손도 바쁩니다. 입도 바쁩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까이하는 공원을 알립니다.
“밤에는 별까지 내려요. 노란 별, 하얀 별, 푸른 별, 빨강별, 보라별까지, 각양각색의 별들이 장 미속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