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처음입니다. 20230627
“처음이세요.”
상대가 물어온다면 대답하는 사이 목소리부터 살짝 떨리기 시작하는 일들.
나는 문득 첫사랑을 떠올리곤 합니다. 첫사랑치고는 너무 유치해서 마음속 깊이 숨겨야 했던 열세 살. 짝사랑이라고 해야만 할까 합니다.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두 근 반 세 근 반, 묻지도 않는 물음에 답을 준비하려고 애쓰는 순간 그녀는 나를 그림자를 보듯 지나쳤습니다. 무심코 보는 듯했지만, 마음만은 온통 그의 발걸음에 집중되었습니다. 지나치는 순간부터 열두 걸음을 마음속으로 헤아렸습니다. 열셋, 열넷 하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내가 머리를 돌려 바라보는 것을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시비란 발걸음이 교차하는 시점으로 하여 열두 발자국째라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웃음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이 기억났습니다. 열두 발자국의 시간을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참지 못하면 머리를 돌리는 순간 눈이 서로 마주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시비라고 했습니다.
“왜 쳐다보는 거야.”
“그-냥.”
미리 고개를 돌렸다면 새침한 눈길에 주눅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처음입니다.”
나는 늘 짝사랑처럼 처음에는 마음이 설레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나의 결혼식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얼떨떨합니다. 남도 하는 결혼이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식장에 들어서니 주변을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걷고 서고 인사하는 등, 로봇처럼 행동했다는 생각뿐입니다.
‘두 번째는 좀 다르겠지요.’
생각을 곧 거두어들였습니다. 두 번은 싫습니다. 괜한 잡념입니다.
이제는 나이를 먹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소용없습니다. 내 성격 탓인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사촌 동생의 딸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내가 살던 고향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옛날의 논밭이 주를 이루던 고장은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는 했지만 내가 떠난 고향은 이미 고희를 넘겼습니다. 논과 밭에는 알 수 없는 길들이 사방으로 나뭇잎의 수맥처럼 뻗어있고 수많은 고층 건물이 그사이를 채웠습니다. 안내 문구가 간단하다는 생각에 컴퓨터에서 지도를 꺼내 약도를 저장했습니다.
전철에서 내렸습니다. 2번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직진 버스정류장.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주변을 살폈지만, 쌩쌩 달리는 자동차 전용도로 양옆으로 정류장이 보이지 않습니다. 머뭇거리는 사이 중 학생 두 명을 만났습니다.
“실례합니다. 버스정류장이 어느 쪽에 있습니까?”
“이쪽인가 저쪽인가.”
모르겠다는 듯 고갯짓을 하고는 사라집니다. 말버릇이 돼먹지 않았다고 느끼는 순간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릴까 하다가 참았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방향을 정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쯤이겠지 했는데 정류장은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온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발걸음이 무뎌졌습니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버스 정류장이…….”
“저 앞에 보이는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서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예식 시작 시각을 막 넘겼습니다. 머뭇거림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환승의 대기 시간이 길었기 때문입니다. 여유를 두고 나왔지만, 전철은 내 마음을 늘 헤아려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늦지 말아야 하는 게 내 신조인데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힘을 잃어갑니다. 노선버스를 확인하고 왔지만, 과거의 사정으로 보아 가끔 바뀌는 번호를 백 퍼센트 안심할 수 없습니다. 후덕해 보이는 아가씨가 다가왔습니다.
“공주 00 대학교 가는 버스 타는 곳이 맞나요.”
“아, 저도 초행이지만 거기서 내릴 겁니다.”
그녀를 따라 내렸습니다.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나도 두리번거립니다. 예식장이 분명 이 근처인데 보이지 않습니다. 주유소를 중심으로 흙더미들이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자동차 도로를 따라 소로가 미로를 연결하듯 좁은 나무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녀를 제외한다면 나 혼자입니다. 지체하는 사이에 중년 부부가 내렸습니다. 그들도 예식장을 찾아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꺼내 위치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맞았군요. 그들을 무작정 따라가자, 앞에서 오는 사람과 마주쳤습니다. 등산객 차림입니다.
“이곳에 예식장이…….”
지팡이를 들어 선을 그어줍니다. 공사장을 가로지르면 가깝다고 했지만 우리는 10여 분이 더 걸리는 안전한 길을 택했습니다.
예식장을 가는 게 아니라 낯선 곳을 여행하는 기분입니다. 외국이라도 여행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입니다. 사람만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로 외국 어느 곳에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형상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장을 섰습니다. 미리부터 길을 아는 사람처럼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뒤를 돌아봅니다. 중년 부부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후덕한 처녀만 열 걸음 뒤에서 부지런히 뒤를 따릅니다. 따라오는 모습이 더워 보입니다. 건물 가까이에 이르자 발걸음을 천천히 했습니다.
“덕분에 잘 왔습니다.”
본관으로 들어섰습니다. 조카의 결혼 장소가 신관입니다.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늦어졌으니 더 늦어져도 괜찮다는 걸까요. 조급함을 떨쳐냈습니다. 식이 끝나고 축하 인사를 하면 되지 하는 심정입니다. 이미 지난 것을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쯤이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지금 실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삼 층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 그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럴 수가 이층 연회석에서 음식을 접시에 담다 보니 눈이 마주쳤습니다. 왜 처음부터 그녀는 후덕해 보였을까요. 잠시 짝사랑했던 꼬마의 얼굴과 비슷하군요.
오늘 밤부터는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질 거라고 합니다. 올 장마를 알리는 폭우도 처음입니다. 창밖으로 눈이 갑니다. 어둠을 깨우려는 불빛을 훔쳐봅니다. 오늘이 처음이고 내일이 처음인 걸 잊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