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133. 달빛 편지 20230714

by 지금은

호박꽃 피는 계절. 여름밤은 볼거리가 많습니다. 어른들이 꼴지게를 지고 저녁 늦게 돌아오면 매캐한 모깃불 연기가 잠시 마당을 감춥니다. 마당 한가운데 맷방석에는 저녁상이 차려졌습니다. 저녁을 먹는 사이에 슬그머니 보름달이 앞산 마루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때다 싶었는지 호박꽃이 눈맞춤 합니다. 반딧불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구름이 드리운 어젯밤보다는 꽁무니의 불빛이 약해 보입니다. 마당을 수놓은 반딧불이를 따라 별들들도 어느새 하늘을 차지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자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슬그머니 사립문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삼촌이 말했습니다.

“아직도 다 놀지 못한 거야, 밝은 달빛에 글자라도 한자 더 보지.”

외양간의 소를 바라봅니다. 부풀릴 대로 부풀린 배가 무거웠는지 바닥에 누워 되새김질합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 오후 내내 소와 냇가에서 지낸 결과입니다. 소는 마음껏 풀을 뜯었습니다.

“옛날 사람 중에는 반딧불이를 등불 삼아 책을 읽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삼촌은 정말 반딧불이를 등불 삼아 책을 읽은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느린 발걸음으로 건넌방으로 향했습니다.

“우리 집에 학자 한 명 나오겠네. 잘하는 거야. 이왕이면 소리 내서 읽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국어책을 펼쳐 든 나를 보자 말씀하셨습니다.

뜰에 앉아 책장을 넘깁니다. 할머니의 말씀이 왠지 쑥스럽게 들립니다.

오늘 신문 기사를 보니 어느 작가가 한 책방에서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둘러앉아 편지를 썼다는군요. 필명을 정해 정성껏 편지를 쓰고 나눠 가지는 우연한 편지 쓰기 모임. 누가 누구의 편지를 갖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때론 모르는 사람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속내가 있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만 전할 수 있는 진심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낯선 사람들과 한 번쯤 그런 얘길 나눠보고 싶었답니다.

달빛 환한 여름밤, 돌아가는 길에 연애편지를 받은 듯 마음이 들떴습니다. 내 편지는 누구에게 갔을까. 나에겐 어떤 편지가 도착했을까. 그만 참지 못하고 가로수 아래 멈춰 서서 편지를 읽었다고 합니다. 왈칵 울 뻔했다지요.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연필로 빼곡하게 써 내려간 어느 엄마의 편지입니다.

‘딸아, 엄마는 요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단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무언가 해 낸 것도 같은데, 그 시간이 내가 되고 너희가 되었다는데, 어째서 지나간 시간을 쥐어보자 면 손바닥이 텅 빈 것만 같을까. 내가 살아온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이 글을 읽는 순간 중학교 사춘기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한창 펜팔에 빠져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 형이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뭐야, 낯선 편지네.”

나는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재빨리 편지를 낚아챘습니다.

“아무것도…….”

말을 얼버무리며 편지를 바지 주머니에 감췄습니다.

내가 편지를 꺼낸 것은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입니다. 달이 창문으로 얼굴을 보이지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습니다. 뜰 마루에 앉아 조심스레 편지지를 펼쳤습니다. 뭐 특별한 사연도 아닌데도 비밀이 숨어있는 양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이야기 끝에는 늘 쑥스럽게 느껴지는 말, 좋아한다는 한 줄이 담겨있습니다. 내용이야 별로 중요한 것은 없지만 답장하기 위해서는 몇몇 날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정성을 보였습니다.

그 엄마의 편지에는 문정희의 시 ‘나무학교’가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었습니다.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작가는 잠시 편지 속의 딸이 되어 마음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누구 엄마가 아닌 당신 자신으로 살아갈 인생을 지지해요’라고 나이테처럼 더 단단해지기를……‘

나는 펜팔을 하는 동안 무슨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몇 차례인가 달 밝은 밤에 뜰에 앉아 숨을 죽이고 편지지를 펼친 기억, 그때마다 노랗게 물드는 종이 위에 내려앉은 설렘뿐, 하지만 서로의 고민을 나누는 동안 쌍무지개를 떠올렸습니다.

오늘 밤에는 달이 뜹니다. 밖에 나가 내가 좋아하는 시라도 한 줄을 읽어야 할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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