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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지구본 20230729

by 지금은

“지구본이 있어야 하는데.”

잠에서 깨자마다 혼잣말했나 봅니다. 어느새 깨어있었는지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웬 새벽부터 지구본.”

“혼잣말인데 용케도 들었네.”

“전에도 같은 말을 했잖아요.”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쇼핑몰을 들여다봅니다. 지구본 대, 중, 소, 가격이 다릅니다. 같은 크기라도 값은 제각각입니다. 매장마다 다릅니다. 겉의 꾸밈에 따라 다릅니다. 몇만 원에서 몇백만 원까지 격차가 큽니다.

‘금테라도 두른 거야.’

예전에 어른들이 가끔 하시는 말을 들었습니다. 겉보기에는 특별히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뭔가 기능이 다르거나 새로운 무언가가 숨어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궁금해서 제법 비싼 지구본을 자세히 확인해 보았습니다. 지구본이 움직이고, 조명을 밝힐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별자리도 있습니다. 어릴 때입니다. 선생님이 단순한 지구본을 회전시키며 설명할 때와는 완연히 다릅니다.

하나 사고 싶습니다. 하지만 선 듯 마음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큰 게 좋을까 작은 게 좋을까, 저렴한 게 좋을까 비싼 게 좋을까.

집에는 세계전도가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큰 지도가 있었는데 이사를 자주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필요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수첩에서 찾아보지만, 글씨가 작아서 불편합니다. 지구본과 달리 땅 모양도 크기가 다르고 위치도 생각과는 다릅니다. 북극이나 남극으로 갈수록 넓이가 실제와 차이가 납니다. 내가 지리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보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이왕이면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습니다.

내가 지구본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외국 여행을 하면서부터입니다. 여행지를 물색하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나라, 위치, 거리, 면적, 기온…….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한 것은 이십여 년 전 겨울철 이웃 나라 중국입니다. 직업상 방학을 이용했는데 첫인상은 좋지 않았습니다. 넓은 나라에 비해 기대와는 달리 우중충한 날씨와 탁한 공기, 한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 그들의 외모와 말씨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퇴직하고 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은 먼 곳부터 하는 게 좋습니다.”

세계 각지를 누비는 나이 많은 여행가의 말입니다.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지만 체력이 우선입니다. 젊었을 때 먼 곳으로 가고 나이를 먹게 되면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게 좋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아내와 상의 끝에 유럽으로 장소를 정했습니다.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도서관을 찾아 여행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여행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여행은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작은 지도가 불편해요. 세계 전도가 있었으면 좋겠구먼.”

나라뿐만 아니라 도시의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가 필요했습니다. 이왕이면 큰 지구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 장만할까요?”

의견 일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집에 지구본이 없습니다. 먹고 쓸 생필품처럼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닌 때문인지 모릅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그때 가져와야 했는데.’

몇 년 전입니다. 쓰레기를 버리러 집하장에 갔습니다. 한 편에 재활용품을 분리하여 모아두는 곳이 있습니다. 지구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외관이 멀쩡합니다. 잠시 멈춰서 살펴보다가 손으로 구를 돌려보았습니다. 매끄럽게 돌아갑니다. 흠집도 없습니다. 잠시 망설이다 돌아섰습니다. 가끔 버려지는 그림책이 있으면 몇 권을 골라 들고 오기도 합니다. 우리 집에는 아이가 없지만 내가 아이를 대신하는지 모릅니다. 그림책에 관심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외국의 번역된 그림책이 색다른 상상을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장난 삼아 그림책 모형을 만드는데 잘 쓰이기도 합니다.

외국을 알고 싶다면 꼭 외국을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간접 경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안에 자꾸만 싸여가는 물건들이 거슬릴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맘먹고 지구본 하나는 마련해야겠습니다. 이왕이면 글씨가 잘 보이는 큰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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