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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3

158. 학교 폭력 20240818

by 지금은

시험 기간이 다가오는데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교실을 마음대로 이탈합니다. 한 자로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데 기회만 되면 시도 때도 없이 운동장으로 뛰쳐나갑니다. 음운의 변화를 가르쳐야 하는데 마음 같지 않습니다.

‘녀름이 여름으로 발음되는 이유’

녀름은 여름의 옛말입니다. 녀름이 여름으로 발음되는 이유는 두음법칙 때문입니다.

두음법칙(頭音法則)은 특정 음운이 어두에서 잘 나타나지 않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한자음 중에서 ‘ㄴ’이나, ‘ㄹ’이 단어 첫머리에 오게 되면, ‘ㄴ’은 ‘ㅇ’으로, ‘ㄹ’은 ‘ㅇ’으로 바뀝니다. 예를 들면 한자음 ‘녀, 뇨, 뉴, 니’가 단어 첫머리에 오면 ‘여, 요, 유, 이’로 변합니다.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부터 이 현상을 법칙으로 규정하였고 대한민국에서는 오늘날까지 표기에 반영하나, 북한에서는 현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표기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요즘 학교폭력 문제로 학생들이나 교사들이 애를 먹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학부모까지 가세하여 교육계는 혼란이 빠졌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에 따라 교사가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 일 때문일까요. 간밤의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내가 처음 교직에 발을 디뎠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그만큼 선생을 중요시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만큼 교사는 학생이나 학부모에 대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사의 권위는 점차 약해지고 대신 학생과 학부모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민주화의 길을 걸으면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보다는 학부모의 교육 정도가 교사와 대등해지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 지도를 오로지 교사에게 맡기던 때와는 달리 점차 간섭하게 되었습니다. 일부의 시민단체와 교육자들이 이에 합세하여 학생의 학습권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과도한 학생의 인권을 부르짖으면서 무분별한 학부모의 요구가 교사들의 사기를 위축시켰습니다. 교사의 인권을 접어둔 채 학생의 인권만을 내세우다 보니 학교의 환경이 악화했습니다.

물론 교사의 책임도 있습니다. 민주화 이전의 일입니다. 시대의 흐름일지는 몰라도 교사의 일부는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아 가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체로 체벌과 촌지 문화입니다. 사회단체와 일부 교육계에서 이를 시정하려는 방법들이 논의되었습니다. 참교육을 외치는 출발은 좋았지만, 취지와는 달리 점차 왜곡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 교사의 억울한 죽음이 학교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교권의 확립입니다. 설 자리를 잃은 교사들이 일어섰습니다. 일그러진 교육 현장을 바로잡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이에 놀란 정부와 시민들이 올바른 학생 교육을 위해 머리를 들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꿈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입니다. 달아난 아이들을 제외하고 몇 명의 아이들을 붙잡고 두음법칙에 대해 말합니다. 예를 들어주어야 하는데 하나의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복도를 지나가던 여선생이 우연히 목격하고 나를 불러냈습니다. 차근차근 설명을 해줍니다. 교실로 들어왔을 때는 아이들이 사라지고 난 후입니다. 내일이 시험인데 걱정입니다. 교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되다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던 다양한 지식이 하나둘 내 곁을 떠나갑니다. 되돌려 보지만 어떤 것은 가물가물할 때가 있습니다.

“여보 왜 그래요.”

내가 헛소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나를 흔들었습니다.

“악몽을 꾸었나 보군.”

내가 퇴직을 하고 일 년여 동안 기간제 교사로 집 근처의 학교에 근무한 일이 있었습니다. 퇴직한 학교와 찾아간 곳은 환경이 달랐습니다. 신도시이고 보니 학교도 학생도 학부모도 세련됐다고 할까요. 6학년 체육 수업을 맡았습니다. 아이들이 선생을 대하는 태도부터 다릅니다.

교육과정에 따라 진행되는 수업에 늘 불만이 많습니다. 저희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합니다. 축구 붐이 일 때입니다. 체육 시간에는 오로지 공만을 찰 것을 요구합니다. 들어주지 않자, 단체로 이탈하여 제멋대로 합니다. 학부모도 그렇습니다.

“교육과정이 뭐 대수라고 체육은 아이들 체력과 건강에만 힘쓰면 되는 거 아니야.”

퇴직 전까지만 해도 걱정을 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교육의 붕괴를 가져오는 조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반항기가 여기저기서 나타났습니다. 학부모의 민원도 점차 늘어났습니다. 인성을 무시하고 지식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되다 보니 일어난 결과입니다.

한 울타리에 있는 우리 동료들은 앞날을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윗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개혁을 주도하는 사회단체와 교육자들은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유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책임지는 자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교사의 죽음을 두고 교육계는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관련된 사람 모두가 발뺌하기에 급급합니다. 학생 인권만을 부르짖던 교육의 수장 몇몇이 이제 와 교육을 개혁하겠다고 합니다.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데 하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어쩌겠습니까. 늘 개꿈이라고 여기던 새벽꿈이 오늘은 생생하게 머릿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소를 잃었으니, 외양간이라도 제대로 고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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