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그만두려다가 20230909
책을 읽다가 뚜껑을 덮었습니다.
‘졸려’
하품이 나오기 전에 일어섰습니다. 낮잠을 자기에는 이릅니다. 눈을 깨워야겠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곳저곳을 뒤집니다. 신문을 보고, 그림도 보았습니다. 음악도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인터넷 여행을 하지만 마땅히 마음을 둘 곳이 없습니다. 글 소재나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어제 글쓰기 강의를 들었는데 꾸준히 쓰고 싶으면 큰 것을 바라지 말고 일상생활에서 작은 것에 관심을 기울여 보라고 합니다. 나와 가까이하는 음식, 옷, 잠, 움직임, 보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미경에 보이는 것처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일기를 꾸준히 썼습니다. 내 스스로는 아니고 선생님의 강요라고 할까, 숙제의 일정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일기장 안 낸 사람 남아요.”
받아쓰기를 틀렸거나 구구단을 못 외 나머지 공부를 하듯, 어제의 일기를 쓰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쓰지 않은 벌로 청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뭘, 쓰지?’
매일 써야 하는 일이고 보면 그날이 그날인데 특별히 쓸 게 없습니다. 일기장을 메워야 하는데 어쩌겠습니까. 없는 말을 지어내고 그마저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몇 달 전에 쓴 일기를 옮겨 쓰기도 했습니다. 몇 번 잘 넘어가나 했는데 오늘은 딱 걸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께 꿀밤을 맞았습니다.
“이 녀석, 지금이 언제인데 아직도 봄이냐?”
차라리 거짓말 일기라도 부지런히 썼더라면 지금쯤은 동화나 소설을 잘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내일은 일기 쓰기 숙제는 내지 않아도 된다. 대신 쓰고 싶은 사람은 말리지 않을게.”
선생님의 말씀에 반 친구들이 교실이 떠나가도록 환호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일기 쓰기의 달인입니다. 쓸게 없다고 퉁명스러운 말이라도 할 때는 늘 하시는 말씀이지만 요령을 알려줍니다.
“관찰 일기 쓸 수 있잖아, 좋은 눈 뒀다 뭐 하니. 생활 일기 쓸 수 있잖아, 늘 움직이잖아. 시를 써도 돼. 정 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림일기라도…….”
“선생님 그림에 소질이 없는데요.”
“정 그러면 오늘 화장실 청소 미리 하던가, 그러면 일기 쓸게 생기니까.”
이것저것 소재를 찾았지만, 마땅한 게 없습니다. 오늘은 쓰기를 그만두어야겠습니다. 컴퓨터의 사용을 끝내려는데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만두려다가.’
마른 수건 쥐어짜듯 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물기가 숨어있었나 봅니다. 여름 내내 그 지루한 장마가 지나가고, 폭우와 태풍이 마음을 졸였습니다. 폭염은 어떠했나요. 88년 만에 가장 긴 열대야라고 했습니다.
이번 평생학습관 글쓰기 강사의 말입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변화를 모색해 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나 장소를 옮겨봅니다. 잠시 다른 일에 관심을 보입니다. 여행하거나 음악을 들어봅니다. 한 마디로 환경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앞에 보이는 책장에 일기장이 보입니다. 초등학생 일기장입니다. 재작년의 쓰레기장에서 쓰기를 분리해서 버리는데 공책 무더기가 눈에 뜨였습니다. 6학년생의 일기입니다. 읽어볼 생각으로 가져왔는데 이제야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이름을 지웠으니, 누구의 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씨가 꽤 단정합니다. 짐작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나와 그 학생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생각이 나지 않는 데, 오늘은 뭘 쓰지.’
어른의 시를 옮겨 썼습니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은이는 없지만 내 기억으로는 안도현 시인의 작품입니다.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학생이 연탄의 애환을 알까 모르겠습니다. 공책을 메우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학생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일기 숙제가 없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쓰는 습관을 기르는 좋은 방법의 하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