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공책 Ⅱ 20230919
‘공책이 어려움을 겪었다고요?’
맞는 말씀입니다.
첫 인연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입니다. 지금이야 공책이 흔하니 아이들이 입학하기 전부터 손에 가지고 놉니다. 글씨의 손놀림도 숙달되어 있습니다.
내 공책은 나를 만나는 순간부터 체면을 구겼습니다. 친구의 것과 생김새가 같았지만 내 손에서 노는 모습이 특이했습니다. 앞장에는 글씨가 오른쪽으로, 뒷장에서는 글씨가 왼쪽으로, 선생님의 눈치를 보는 동안 일어나는 일입니다. 공책의 앞장이 펼쳐지나 했는데 어느새 끝장이 펼쳐졌습니다. 한 시간 동안에도 여러 번입니다. 연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른손에 가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왼손에서 놀고 있습니다.
“뭐야, 너 글씨를 쓰고 있는 거야, 그림 그리는 거야? 지렁이가 기어간다.”
아이들의 손이 내 공책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장난했습니다. 앞장을 펼치고 뒷장을 펼치며 흉을 봅니다. 내가 공책을 빼앗으려고 하자 저쪽 친구를 향해 공책을 날립니다. 공책이 이리저리 날아다닙니다. 때에 따라서는 곤두박질치며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기도 하고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합니다. 반듯한 공책이 구겨졌습니다. 나는 장난을 시작한 친구를 향해 눈을 흘겼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네 공책 보면 어떻게 하실까. 꿀밤 하나.”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나는 그동안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오른손, 왼손으로 연필이 건너뛰기로 했습니다. 공책의 앞장을 열었다가 뒷장을 열었다 반복했습니다. 왼손이 오른쪽을 향해 글씨를 그리기도 하고, 왼쪽으로 옮겨가기도 했습니다. 공책 한 권이 두 권이 된 셈입니다.
나는 왼손잡이입니다. 초등학교 국어 첫 시간부터입니다. 어느새 길든 습관이 처음으로 나를 혼돈 속으로 몰아갑니다.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야지. 학교에 가는데 창피하지 않겠어.”
한동안 식구의 성화에도 꿈쩍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집으로 일관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와 싸운 일이 있습니다. 화가 난 그가 내 약점을 꼬집었습니다. 공부 시간입니다.
“너 글씨를 그렇게 쓰면 선생님께 이를 거야.”
나는 선생님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친구에게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습니다.
다음날입니다. 받아쓰기 시험을 보았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열 개의 낱말 중 일곱 개나 틀렸습니다. 나머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녀석 봐라. 공책이 왜 이래.”
앞장을 살피셨습니다. 뒷면에도 눈이 갔습니다. 잠시 신기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것도 잠시뿐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의자 들어. 왼손으로 쓰기만 해 봐.”
한동안 매일 나머지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받아쓰기와 오른손 글씨쓰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놀림이 늘었습니다. 왼손의 힘만 못해도 글씨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글씨만큼은 오른손잡이가 되었습니다.
퇴직 후입니다. 심심풀이 겸 재미 삼아 왼손에 연필을 쥐었습니다.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지금은 왼손과 오른손의 글씨 모양이나 쓰기 속도가 같아졌습니다. 깍두기공책에는 몇 년 새 내 왼손 글씨가 더 어울립니다.
가끔 신기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왼손으로 글씨를 쓰시네요.”
“오른손이 힘들까 봐서요.”
“아 그러시군요.”
선생님으로부터 어릴 적 내 고집을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명필이 될 기회를 잃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마음먹은 대로 해보는 거야. 글쓰기도 끈기가 중요한 게 아니겠어.”
이제 글씨는 왼손과 오른손이 공평하게 나눠 가졌고, 공책은 제구실을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