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글쓰기와 학용품 20230922
며칠 전 글쓰기 강의 시간입니다. 글쓰기의 주제가 생각나지 않을 때는 주위를 둘러보라고 합니다. 의외로 눈에 띄는 것이 있을 수 있답니다. 크고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씨름하기보다는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가질 때 의외로 글쓰기가 편해질 수 있다며 예를 들었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무엇이 보입니까? 컴퓨터, 공책, 연필, 아니면 컵…….”
각자 다른 것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10분 동안 공책, 컵, 선풍기의 셋 중 하나를 골라 글을 쓰자고 했습니다. 이어령의 책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고유의 물건들을 주제로 이미지를 붙여가며 쓴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골무’를 손가락의 투구, 옛날 부녀자들의 다듬이를 악기가 된 평화로운 곤봉에 견주었습니다.
나는 공책을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10분의 짧은 시간이니 완성하지 못하고 수업이 끝난 후 매듭을 지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고른 이유는 내 손이 공책과 연필 지우개를 특별하게 연출시켰기 때문입니다. 나는 왼손잡이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글씨를 쓰는 시간이면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왼손에 연필을 잡으면 힘은 있지만 글씨의 방향이 맞지 않습니다. 오른손에 잡으면 힘이 부족해 획을 정확하게 그을 수 없습니다. 왼손, 오른손, 공책의 앞장, 뒷장을 넘나드는 혼란을 겪었습니다. 오른손이 공책의 앞장을 찾아가기까지는 일 년 동안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은 후에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글씨 쓰기의 오른손잡이 길입니다.
오늘 아침에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주제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주위를 살폈습니다.
‘아, 그렇지. 지우개, 연필’
생각을 떠올리니 지난날들의 모습이 하나둘 머리를 스쳐 갑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학교에서 철로 된 필통을 받았습니다. 뚜껑이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열립니다. 지금은 그런 필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연필과 지우개도 받았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이니 모든 것이 귀하고 공산품의 품질도 좋지 않았습니다. 잘 부러지는 연필,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 힘없이 잘 찢어지는 공책…….
잘못 쓴 글씨를 지우려고 네모 칸 속의 글자를 문질렀습니다. 딱딱한 지우개는 제 할 일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지우다 보니 검정이 묻어납니다. 깨끗하게 하려고 여러 번 문지르자, 공책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연필은 어떻습니까. 나무와 연필심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면 필기구의 기능을 잃었습니다. 부러진 연필을 깎았는데 몇 글자 쓰기도 전에 부러집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연필을 깎다가 한 자루를 다 소모했습니다. 부러지고, 또 부러지고……. 집에 와서 혼났습니다.
“하루도 안 돼서 연필을 다 썼다는 거야.”
이유를 말했지만, 조심성이 없다는 꾸지람만 들었습니다.
말썽 부리는 지우개, 공책을 검게 만들거나 네모 칸의 구멍을 냅니다. 지우개는 잘 닳아야 하는데 너무 딱딱해서 지우는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지 못합니다. 하루는 여기저기 구멍 난 공책을 보고 친구가 말했습니다. 지우개를 석유에 하루 동안 담갔다 사용하면 부드러워져서 글씨가 잘 지워진다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지우개를 실에 매달아 석유병에 집어넣었습니다. 다음날 꺼내보니 부드럽습니다. 글씨를 지워보니 잘 지워집니다. 식구들에게는 내가 생각해 낸 양 자랑을 했습니다.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이 문제입니다. 이틀 정도 지나자, 지우개는 기능을 잃었습니다. 다시 딱딱해진 이유입니다. 담갔다 사용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시절 미제물품의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만큼 생산품을 만드는 기술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사는 사촌 형님이 방학 때 왔다가 연필 한 자루를 주었습니다.
“미제야, 공부 열심히 해.”
실수로 몇 번이나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특별한 것을 제외하고는 외제 물건을 찾는 사람들이 드뭅니다. 그만큼 우리의 공산품의 품질이 좋아진 결과입니다. 일부 외제 물건을 찾는 사람은 품질에 비해 싸다는 이유입니다. 이제는 학용품도 기능이나 용도에 따라 다른 성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필을 예로 든다면 심이 딱딱한 것부터 무른 순서대로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제도용이냐, 일반용이냐, 미술용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지우개도 그렇습니다.
어느새 우리나라는 경제가 발전하여 세계 10대 교역국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풍부하고 여유롭습니다. 우리 집에는 연필을 비롯한 필기구들이 남아돕니다. 남이 이런저런 이유로 준 물건들입니다. 관공서나 행사장 등을 가면 내 것처럼 쓸 수 있는 필기구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배려가 좋기는 하지만 너무 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 책상에는 보이지 않던 볼펜이 두 자루나 있습니다. 병원과 은행에 들렀는데 홍보용이라며 하나씩 내게 내밀었습니다. 가볍고 몸에 지니기에 좋습니다. 모양도 맘에 듭니다. 흔하다고 우습게 여길 게 아니라 곱게 써야겠습니다. 오늘은 학용품에 얽힌다고 생각하다 보니 글을 한 편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