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빨래 20230926
가을 햇살 가득한 날, 시골의 안마당을 사랑합니다. 무더위를 이기고 울타리의 대추가 익어갑니다. 담 너머의 감이 익어갑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데워진 한낮의 따끈한 햇살과 바람이 빨래를 안았습니다. 긴 빨랫줄을 바지랑대가 하늘을 향해 받쳐 올렸습니다. 다른 날과 다릴 옥양목 이불 혼자서 줄을 차지했습니다.
나는 지금 어릴 때의 안마당 풍경을 머릿속에 수놓는 중입니다. 아침을 먹자, 강아지처럼 엄마를 졸랑졸랑 따라 동구 밖 냇가로 갔습니다. 엄마의 큰 함지박 위로 봉분이 하나 생겼습니다. 겨울철 마당의 눈을 쓸어 모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한참 동안 징검다리가 놓인 개울이 울렸습니다. 빨랫방망이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빨래와 물과 방망이와 넓적한 돌이 만들어 내는 합작품입니다. 물론 주인공은 엄마의 손입니다.
‘탁탁 탁탁’
한동안 쉴 새 없이 이어졌습니다. 넓은 천이 이리 젖혀지고 저리 젖혀지면서 철썩철썩 매를 맞았습니다. 이윽고 흘러가는 물에 천이 펼쳐지고 비눗물과 함께 찌든 때가 홑청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릴없이 물장구를 치다가 엄마의 치마폭을 잡고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검정 고무신에서는 아직도 찌걱찌걱 물의 찌꺼기가 남아 발을 미끄럽게 합니다. 뜰에 올라서자, 고무신을 벗어 엎어 놓았습니다.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립니다.
감나무와 대추나무에 연결된 긴 빨랫줄에는 갓 빨아온 옥양목 빨래가 널렸습니다. 펼쳐진 빨래를 바지랑대가 힘겹게 받치고 있습니다. 무거운 빨래는 휘리릭 하고 스치는 바람에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물기를 머금은 옥양목의 무게가 바람을 우습게 여기는 모양입니다. 잠시 천에서 아래로 몰리는 물이 빨랫줄을 따라 땅바닥에 긴 선을 늘였습니다.
풀을 먹인 옥양목에서는 며칠 동안 잠자리를 하는 사이 가을 햇볕의 냄새가 납니다. 바람 소리, 가랑잎 부서지는 소리도 납니다. 나는 어릴 때는 뻣뻣한 천이 싫었습니다. 얼굴이나 팔다리를 스치는 감촉입니다.
“엄마, 이 이불 싫은데.”
“새로 한 거라 좋은 건데.”
“너무 뻣뻣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소리가 납니다. 이불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사나흘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불 홑청이 빨랫줄에 널리는 날은 기분이 좋습니다. 동생과 술래잡기를 할 수 있고 햇볕이나 바람과도 놀 수 있습니다. 혼자서도 술래잡기가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한 번은 사고를 쳤습니다. 엄마를 돕는다는 게 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빨래가 빨리 마르라고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받혀진 바지랑대를 하늘을 향해 힘껏 올렸습니다. 잠시 후 돌개바람이 ‘휙’ 이불을 치자 바지랑대가 쓰러지며 줄도 함께 끊어졌습니다. 휘청하고 무거운 홑청이 그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엄마는 한숨과 함께 그 바쁜 일손에도 바닥에 팽개쳐진 빨래를 함지박에 담아 냇가로 가셔야 했습니다. 엄마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잘못을 저지른 것을 알기에 눈치만 보았습니다.
내가 이불의 냄새를 좋아한 것은 중학교 때입니다. 서울로 이사했던 나는 방학이면 고향의 할머니를 찾아뵀습니다. 손자가 왔다고 새 이불을 꺼내 주셨습니다. 유년 시절처럼 이불에서는 햇볕 냄새와 바람 냄새, 그리고 이불의 바스락 거림이 내 지난날을 불러왔습니다.
방학이 끝나가고 새벽의 찬바람을 느끼는 날, 할머니는 요 홑청과 옷 몇 가지를 머리에 이고 빨래터를 향했습니다. 빨랫방망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끝이 났다 싶을 즈음 빨래터로 향했습니다. 물을 먹은 빨래를 손으로 비틀어 짰지만 무겁습니다.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고 바지랑대를 하늘 높이 올렸습니다. 국기 게양대처럼 하늘을 수직으로 받혔습니다.
“너무 꼿꼿이 세우면 안 된다.”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알맞게 비스듬해야 한답니다. 때로는 느슨한 삶이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삶의 지혜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못지않습니다. 경험에서 얻은 상식입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아이 키우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옛날 사람들과 비교하면 직접 부딪쳐 보는 삶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공부에만 온 정신을 쏟다 보니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무언가에 맞닥뜨릴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옷가지를 넣은 세탁기가 돌아갑니다. 주부의 마음을 알아서 해줍니다. 이불 빨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아파트에서 함께 쓰는 대형세탁기가 있습니다. 동전을 넣고 단추를 누르면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얼마 후 이불을 뽀송뽀송하게 말린 채 토해냅니다.
좋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추억 하나는 사라졌습니다. 햇볕 냄새, 바람 냄새, 가랑잎 밟는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