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껍질을 보다가. 202330926
‘겉 다르고 속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 아보카드를 먹고 씨를 버리려다 가을 색을 닮은 통통하고 동그란 모습에 금방 버리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보아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골프공보다 작지만 그만큼 무게가 나갑니다. 습기를 머금고 있어서 아니면 원래 씨앗의 무게가 있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화분 옆 창틀의 턱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창가로 다가갔습니다. 오후 늦게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와는 달리 아파트의 벽이 젖었습니다.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파란 하늘을 예상했는데 흐린 빗줄기는 안갯속에 묻힌 듯 조용하기만 합니다. 눈이 자연스레 화초로 옮겨갔습니다. 시름시름 앓던 포인세티아의 잎사귀가 생기를 얻었습니다. 관심을 둔 덕분입니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아보카드의 씨앗이 졸린 눈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생생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껍질이 주글주글합니다. 화초의 건강과 서로 맞바꿨을까요. 그냥 그렇게 풋풋함을 간직하려니 했는데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세상은 항상 변화한다는 진리를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전에도 아보카도 씨앗을 지금처럼 창가에 놓아두고 관찰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처럼 씨앗은 같은 과정을 거쳐 가리라고 예상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겉껍질이 마르고 속도 마릅니다. 다른 것이 있습니다. 겉껍질이 마르고 퇴색하면 부서지고 속살의 하얀 씨앗이 몸을 드러냅니다. 손으로 껍질을 벗겨봅니다. 아직은 허물을 벗을 준비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좀 더 마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의 과정을 살펴보니 완전히 마르면 퇴색된 껍질이 손을 대기가 무섭게 떨어집니다. 속살은 가벼워지고 색깔이나 모양도 예뻐 아이들 장난감으로 사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 년 내 책상에 놓아두었어도 먼지를 타지 않는다면 그 모습 그대로 세월을 따라갈 것 같습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속이 더 좋아 보입니다.
가을입니다. 덥다, 덥다고 했는데 어느새 추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정오의 더위는 남아있지만, 여름은 저만큼 물러나고 있습니다. 비가 내려서일까요. 서울의 ‘마로니에 공원’과 함께 노래, ‘그 사람은 잊었지만’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나는 지금 누구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또 다른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마로니에 열매입니다. 우리 집 건너편 공원에는 마로니에 나무가 네모난 잔디밭 가장자리로 줄을 지어 햇살을 가리고 있습니다. 한 달 전쯤 태풍에 꺾인 줄기의 열매를 가지고 왔습니다. 창가에 매달아 놓았는데 겉껍질이 갈라지면서 알밤을 닮은 씨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실눈을 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속에서 반짝이는 씨앗이 귀여워 보입니다. 드디어 씨가 껍질에서 탈출했습니다. 반짝반짝 윤기가 자르르 흐릅니다. 밤나무에서 갓 떨어진 밤송이에서 꺼낸 알밤 같습니다. 며칠 동안이었습니다.
지금은 볼품을 잃었습니다. 아보카도 열매와는 달리 쭈그렁바가지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씨앗이 수분을 잃으면 주글주글해지는 것처럼 이것도 예외는 아닙니다. 심하다고 해야 할까요. 며칠 사이에 퇴색될 때로 퇴색된 껍질은 윤기를 잃고 푸석합니다. 작년에 나무 밑에 떨어진 알맹이가 귀엽다는 생각에 가져온 일이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렸습니다. 한 알을 발로 밟아보니 ‘아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바스러졌습니다.
이를 모르는 아내가 밤을 닮은 열매를 보며 먹어도 되냐고 했습니다. 만져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열매가 속 다르고 겉 다른 것처럼 사람들의 세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지만, 열매의 처지에서 보면 다 있어야 할 존재입니다. 아보카도는 열매로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마로니에는 열매가 아니라 나무와 그늘로 사람의 눈길과 발길을 사로잡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 인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다시 일기예보를 확인합니다. 예보가 바뀌었습니다. 오늘을 온종일 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어제 보던 책을 옆으로 밀어냈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사색해야 할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