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224. 생명 20231004

by 지금은

‘생명은 유한하나 의지는 무한하다.’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풀 한 포기를 보는 순간 지금까지의 생각이 되살아납니다. 잘려도 잎이 나고, 꺾여도 머리를 듭니다. 밑동이 잘렸어도 새 줄기가 솟아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정 짓기는 뭐해도 사람이든 동물이든 지금까지의 삶이 생각대로 온전히 이어온 경우는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름의 파고를 넘나들며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아침입니다. 셔틀버스를 타고 복지관으로 향하다 신호등 앞에 멈췄습니다. 추석 연휴로 인해 이 길을 열흘 이상이나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아침에는 기온이 낮아졌습니다. 밖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며칠 전의 모습과 별다른 점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나를 달구던 더위는 한풀 꺾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하던 버스 안이 지금은 바깥 기온보다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버스가 막 출발하려던 순간입니다.

‘이게 뭐야.’

생각지 않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이곳을 지나쳤지만, 낯선 모습이 동영상의 한 장면처럼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잠시 눈여겨보고 싶었지만, 버스는 이내 옆을 스치듯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다행입니다. 낯선 모습이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의 머리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맞아, 그곳이지. 도서관 앞길에서 모퉁이를 도는 곳, 대로와 대로가 만나는 곳, 차와 차가 엇갈리는 곳, 우회전하려고 운전사가 눈치를 보아야 하는 곳, 바로 그곳입니다. 우회전을 할 수 있지만 좌회전을 할 수 없는 곳, 바로 이곳입니다. 중언부언 말이 많았습니다. 장소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좌회전을 금지하는 봉이 차도를 일부 가로막았습니다.

바로 플라스틱 봉입니다. 이 봉을 따라 다섯 포기의 갈대가 무릎 높이로 서 있습니다. 제각기 크기가 다릅니다. 서열이라도 정하려는 듯 차가 가까운 쪽으로 풀의 높이가 낮습니다. 차체가 일으키는 바람에 가는 몸이 떨고 있습니다. 생명이 끈질김을 알 수 있는 장면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눈여겨보게 된 것은 특이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네 포기는 아스팔트 위에 몸을 고정한 채 달리는 차에서 쏟아지는 바람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데 한 포기는 줄기의 대부분을 플라스틱 봉안에 몸을 감추고 상반신만 드러냈습니다. 대장이라도 된 느낌입니다. 아니 높은 지위에 있다고 치면 어떨까요.

나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양 머릿속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내려서 사진이라도 찍을 생각입니다. 사진 에세이로도 써야 할까 봅니다. 나는 올봄에 복지관에서 사진 에세이 강의를 들었습니다. 하고 보니 흥미가 생겨 사진을 찍고 글을 간단히 올리는 일이 취미처럼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내 주변의 풍경이나 사물의 모습에 대해 저절로 관심이 갑니다.

몇 년 전 일입니다. 송도의 아트센터에 간 일이 있습니다. 본 건물이 완성이 된 상태에서 이를 중심으로 부속 건물을 올리는 중입니다. 공사의 안전을 위해 가림막이 설치되었습니다. 공연장 이층에서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가을 하늘에 손이 닿으면 물이라도 들 것처럼 파랗습니다. 멀리 뭉게구름이 지평선에 닿았습니다. 이를 배경 삼아 긴 갈대가 바람에 나부낍니다. 구름에 기대어 서 있는 갈대는 나를 먼 곳으로 빨아들였습니다. 사실 갈대는 내 앞에서 이십여 미터 떨어진 가림막의 꼭대기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땅을 놔두고 몇 미터나 높은 가림막 꼭대기에서 곡예라도 할 듯 바람에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습니다. 누구에겐가 말로 표현하면 믿지 않겠다는 생각에 증거를 남겨야 합니다. 나는 대단한 사진가라도 되는 양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특이한 사진이라는 자랑을 했습니다. 생명의 끈기와 고귀함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중에 이것이 내가 만든 그림책 뒷장의 표지로 쓰일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생각지 못한 소득입니다.

나는 이렇게 특이한 것들을 가끔 발견합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나와 어렵게 노란 꽃을 피운 민들레, 바위 위, 한줌의 흙먼지 속에서 꽃을 피운 씀바귀, 장마철 시멘트 바닥을 뚫고 그늘막 기둥을 의지해 솟아오른 메꽃 등. 생명의 고귀함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나는 시멘트 바닥에서 공을 차다가 이를 보는 순간 발길을 멈췄습니다. 공을 차기 위해서 메꽃 줄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고 싶었지만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위에 있는 벽돌을 서너 장 가져다 임시 보호막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차도를 가르는 안전봉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갈대의 홀씨가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까지 말입니다. 어느덧 가을입니다. 누구의 관심도 없이 따가운 태양과 바람을 견뎌야 했습니다. 어렵게 생명을 이어왔으니, 그의 자손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다른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지관에서 점심을 먹고 발길을 서두릅니다. 셔틀버스보다 먼저 가야 합니다. 관심을 두고 이름도 불러주기로 했습니다. 사진도 한 장 찍어주기로 했습니다. 삶에 어려움으로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용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림책 이야기를 만들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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