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마음의 눈 20231015
‘참 곱기도 해라.’
햇볕 따스한 어느 날 아침입니다. 길을 걷다가 잔디밭 가장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아지랑이가 꼬물꼬물 합니다. 목욕탕의 표시처럼 김이 올라가는 낌입니다. 그 속에 민들레가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솥뚜껑을 열면 서린 김에 밥알이 잠시 희미하게 보이는 것처럼 노란 얼굴을 감추었다 내미는 모습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갓 피어난 꽃은 더 예쁩니다. 그냥 보기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진을 확인했습니다. 생각한 대로입니다. 토끼풀의 초록을 배경 삼은 노란 꽃은 단출하면서도 그저 예쁘기만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기를 닫으려다 다시 펼쳤습니다. 무엇인가 배경 화면을 일부 가린 게 있습니다.
민들레 홀씨였군요. 내가 꽃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홀씨는 아지랑이를 타고 하늘을 날 생각을 하는 중인지 모릅니다. 돌아섰던 몸을 다시 돌려 홀씨로 눈이 갔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물체입니다. 노랑이 하양보다 앞섰나 봅니다. 홀씨도 꽃만큼이나 싱싱합니다. 색깔이 다를 뿐입니다. 흠잡을 데 없는 원형 모양의 홀씨는 갓 중년을 넘긴 머리가 허연 얼굴이라면 좋을 듯싶습니다. 며칠 후면 바람을 타고 여행을 떠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봄이면 꽃에 홀리고 가을이면 열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봄이면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 어디에 눈을 둘지 두리번거리는 때가 있습니다. 나를 먼저 보아 달라는 듯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서 꽃망울을 내밉니다.
눈을 녹이며 피어나는 설화를 비롯하여 산수유, 매화, 벚꽃……. 앞다투어 피어나는 꽃들을 보다가 그만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도 합니다. 새로 돋는 연두색 잎도 꽃만큼이나 예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봄에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모습에 가야 할 시선이 많습니다.
봄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꽃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꽃에 취하다 어느새 여름을 맞이합니다. 여름이라고 해서 뭐 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름은 여름대로 푸른 속에서도 뽐내는 게 있습니다. 장미입니다. 봄꽃 축제라면 벚꽃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여름꽃 축제라면 장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벚꽃 축제만큼이나 이곳저곳에서 장미 축제를 엽니다. 우리 고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축제 못지않게 여러 종류의 장미가 나를 기다립니다. 바로 집 앞길 건너 공원입니다. 장미꽃이 만발하는 시기가 되면 공원 삼분의 일은 꽃이 차지합니다. 이곳에 와서 꽃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진사가 된 모습입니다. 무리를 지어 너도나도 사진을 남기기에 분주합니다.
일요일이나 휴일은 인산인해입니다. 주차장은 일찍부터 만원입니다. 자가용이 공원의 차도 가장자리를 에워쌌습니다. 마치 차량 막을 설치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늦게 온 자동차는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주변을 빙빙 돌기도 합니다. 마치 하릴없이 빈둥대는 사람 같습니다.
나는 쉬는 날이면 이 좋은 곳을 마다하고 다른 곳의 장미원을 찾아갑니다. 마치 집 앞에 벚꽃 단지를 놔두고 먼 곳을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보아서 감흥이 떨어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여행의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일까요. 여하튼 해마다 가까운 곳을 두고 가보지 않은 곳으로 향합니다. 보는 목적도 있지만 가고 오는 재미도 있나 봅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군요. 그래서 여행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라고 했지요. 학습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공원길입니다. 불그죽죽한 열매의 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수양버들처럼 휘어져 햇빛에 반짝입니다.
‘뭐야, 저 열매는.’
이 길을 수없이 지나쳤는데도 좀 전까지만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꽃이나 잎이 화려하지 않은 까닭이라 여겨집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알알이 줄지어 선 열매가 버찌 모양을 닮았는데 이름을 알 수가 없습니다.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작정 한 알을 따서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쓰고 떫다는 생각이 듭니다. 덜 익어서 그럴 거야 하는 마음으로 ‘퉤’하고 입안의 씨를 뱉었습니다. 흔한 밤이나 감을 놔두고 무엇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집에 가면 여러 가지 과일이 냉장고나 식탁에 놓여있는데도 말입니다.
시골에 살면서 산이나 들을 쏘다니는 동안, 이 맛 저 맛 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무를 벗어나 몇 발짝 옮기자 다른 나무에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귀룽나무’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나무의 특성이며 열매의 효능이 쓰여 있습니다. 약용으로 먹어도 되는 열매입니다. 열매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귀룽나무와 친구를 할 생각입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는 열매, 오가면서 한 입, 새들과 나눠 먹어야겠습니다.
봄은 꽃의 계절인 것처럼 가을은 열매의 계절입니다. 잎도 한몫합니다. 뉴스를 보니 설악산에는 단풍의 기미가 보입니다. 서서히 입맛을 다시며 까치밥을 바라볼 날이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