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막걸리 한 사발 20231119
‘크으’
막걸리 한 사발에 총각무 한 조각, 손가락 한 번 빨고 입술 한 번 쓱 문지르고. 어려서 농촌에서 흔히 보던 일입니다. 농번기 힘든 일을 하다 보면 목이 마르기도 하고 배가 출출하기도 합니다. 한 잔의 막걸리는 지친 몸을 빠르게 회복시켜 줍니다. 어린 나이에도 가끔 술맛을 보았습니다. 마신다기보다는 입맛을 다셔보는 정도입니다. 처음 그 맛이 시큼털털했지만 나이가 들자 어느새 익숙해졌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할 때입니다. 아직은 따가운 햇살에 풀을 베고 주변의 나무를 다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흘러갑니다. 새참 때가 되었습니다. 친척들이 모이다 보니 각자 가져온 먹을거리가 다양합니다. 하지만 늘 빠지지 않는 게 바로 막걸리입니다. 지금이야 병에 담은 것이지만 예전에는 한 말들이 큰 통에 담아왔습니다.
잠시 쉬는 동안 과일과 음식을 펼쳐놓았습니다. 어른들은 우선 막걸리에 손이 갑니다. 마른 목을 축여야 합니다. 순서대로 따르다 보니 마지막 무렵 내게도 잔이 돌아왔습니다. 한 잔을 받아 뒤돌아 들이킵니다. ‘카’하고 큰 소리를 내려다 멈칫했습니다. 어른들 앞에서 감히, 손을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어느새 사이다 맛보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오늘은 안주가 고급입니다. 음식을 이것저것 가져오다 보니 고기도 전도 있습니다. 막걸리에는 전이 최고입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덥힌 전은 입안을 부드럽게 합니다. 개운한 맛을 말한다면 총각김치만이야 하겠습니까.
얼마 전 청주에서 막걸리와 못난이 김치 축제를 열었습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막걸리 제조업체가 축제를 3일 동안 열었는데 5만여 명이 몰렸답니다. 농산물 판촉 행사를 곁들였습니다. K-팝에 힘입어 우리의 막걸리가 외국으로 수출이 되기도 한답니다. 10여 년 전에 유럽을 여행한 일이 있습니다. 음식점에서 우리나라의 소주를 발견했습니다. 가격을 물어보니 만 오천 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져갈 걸 그랬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싼 술을 먹어보는 기분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문화와 음식을 익히듯 그곳의 술을 시음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막걸리 하면 술도가가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옆에 양조장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술도가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잘 쓰지 않는 말이기에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술(막걸리)을 만들어 도매하는 집’입니다. 집 안에는 내 키보다 더 깊은 술독을 묻어놓고 커다란 나무 국자로 휘휘 저어 주전자에 담아 주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남자 어른들은 술도가에 들러 신김치에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농번기가 되면 가끔 술 심부름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전자를 들고 오면서 어린 나이지만 남들의 이야기처럼 술을 한 모금씩 맛보기도 했습니다. 시큼하면서도 달콤하고 떫은맛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모내기하거나 벼 베기를 하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품앗이합니다. 아이들은 농번기 방학을 맞아 모를 나르거나 어른의 지시에 따라 못줄을 한 칸 한 칸 옮기기도 합니다. 가을에는 볏단을 나르는 등 잔심부름합니다. 이때는 주전자가 아니라 술통이 등장합니다. 양조장에서 배달하는 사람이 지게나 자전거에 몇 통씩 가져옵니다. 부녀자들은 광주리에 안줏거리와 먹을 것을 이고 등장합니다. 온 동네의 사람들이 모인듯합니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모를 내는 일도 벼를 베는 일도 기계의 힘을 빌립니다. 수십 명이 할 일도 한 사람의 기계 조작으로 짧은 시간 내에 해냅니다. 소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손을 절약하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지만 추억은 하나 사라졌습니다. 더구나 농악놀이는 시골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농사철이 아닌 때 행사로 옛날의 풍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예전에 비해 막걸리의 소비가 줄었습니다. 대신 소주, 맥주 등 다른 술들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막걸리를 먹어본 지 언제인가 까마득합니다. 벌초를 가도 막걸리 대신 소주나 청주를 한 잔 음복으로 마시게 됩니다.
막걸리는 왜 막걸리일까. ‘막 걸러서’ 막걸리는 방금 거른 신선한 술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유통기간이 짧습니다. 날짜가 지나면 쉽게 상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는 막걸리로 식초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고향 집 뒤편의 굴뚝 턱받이에 옹기로 된 식초 항아리가 몇 개 있었습니다. 바로 막걸리를 담아 발효시키는 그릇입니다. 막걸리는 서민이 거친 술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약주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값싸고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던 막걸리가 한동안 소주, 맥주 등 다른 술들에 밀려 외면받은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막걸리는 서민의 술이면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입니다. 서울 탑골공원 주변에서 막걸리 한 사발에 천 원, 안주 공짜라는 식당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등산로에는 막걸리를 양은그릇에 파는 곳이 있습니다. 땀을 흘리고 나서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한 잔 마시는 맛은 달콤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불행입니다. 마시고 싶다면 하산을 한 후에 맛을 보는 게 좋겠습니다.
막걸리의 효능이 과대 포장되었기 때문일까요. 요즘 한 병에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막걸리가 등장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서양의 고급술에 비하면 값이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민 술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비 오는 날의 막걸리와 지글지글 빈대떡.’
할머니의 손맛, 어머니의 손맛, 아내의 손맛을 구분하기는 어려워도 비 오는 날의 정취는 예나 지금이나 추억입니다. 세월이 곰삭아서일까요.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