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287. 학교 가는 길 20231130

by 지금은

세월은 참 빠릅니다. 눈 뜨면 아침이고 돌아서면 또 하루가 지나가 버립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밤늦게까지 음악을 들으며 사색에 잠겼는데, 어느새 11월의 끝 날이 찾아왔습니다.

창밖으로 얼굴을 내미니 기다렸다는 듯 매서운 공기가 얼굴을 향해 달려듭니다. 콧구멍이 확 뚫리는 기분이 듭니다. 흐릿했던 머리가 확 깨어나는 느낌입니다. 가방을 멘 크고 작은 아이들이 보입니다. 곰돌이 같아 보이는 친구가 눈에 뜨입니다. 두툼한 옷을 입었습니다. 어젯밤 일기예보처럼 추운 날인가 봅니다.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줄이 꼭 행사장으로 향하는 기분입니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무슨 볼일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아이들이 궁금했습니다. 날씨도 궁금했습니다. 아직은 등이 따스합니다. 두꺼운 외투를 걸쳐 찬 공기가 몸을 파고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중간에 끼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들의 보폭에 맞춥니다. 모습이 제각각입니다. 활발하게 옆 사람과 겅중거리며 걷는 아이, 몸을 꼿꼿이 한 채 로봇처럼 걷는 아이, 몸을 웅크리고 걷는 아이, 장갑 낀 손으로 귀를 가린 아이, 핫팩을 손에 쥔 아이, 함께 가는 학부모도 보입니다. 아이처럼 가방끈을 어깨에 걸쳤습니다. 다르다면 가방의 끈 하나만 끼웠을 뿐입니다. 아, 강아지도 두 마리 보입니다. 외투에 모자까지 썼군요.

추운 날씨 탓일까요, 길 양쪽의 가장자리는 하얗게 서리가 맺혔습니다. 낙엽 위에, 맥문동 머리 위에, 가로수의 사철나무에도 내렸습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깁니다. 밑창이 닳은 신발 때문일까, 미끄럽다는 느낌이 듭니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손이 시립니다. 코끝이 싸합니다.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까지 맺힙니다. 마스크를 꺼냈습니다. 코로나와 독감 걱정에 늘 지니고 다닙니다. 유행이 주춤해졌지만, 염려가 되어 많은 사람이 보일 때는 슬그머니 꺼내 얼굴을 가랍니다. 오늘 같은 날은 온종일 쓰고 있어도 답답하지 않을 겁니다.

어느새 교문 앞까지 다다랐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손자나 손녀라도 바래다주는 것으로 짐작할지도 모릅니다. 배웅할 사람이 없으니, 인사를 하거나 손을 흔들 일이 없습니다. 내 어릴 때의 모습을 상기하며 아이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교문에 나와 있던 선생님이 인사를 합니다.

“손자 등교 때문에 오셨군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발길을 돌립니다. 학교 울타리를 벗어날 즈음 구석에 공이 하나 보입니다. 밤새 흰 머리칼로 염색했나 봅니다. 햇살에 반짝입니다. 발로 툭 건드렸습니다. 잠이 덜 깼을까, 움직임이 둔합니다. 발로 지그시 밟았습니다. 바람이 빠졌군요. 낡은 옷을 입은 듯 이음매가 닳았습니다. 갈라진 틈이 보입니다. 발로 굴려 인도로 꺼냈습니다. ‘털컥털컥’ 발길에 힘들게 굴러갑니다. 학교에서 좋지 않은 기분으로 돌아가는 어릴 때 나의 모습을 보는 기분입니다.

내가 다니던 등하굣길은 지금의 도시 학교에 비해 퍽 멀었습니다. 산촌의 학교 가는 길은 더 춥습니다. 골바람도 있고 그늘도 많습니다. 반짝 햇살이 비추고 있지만 제아무리 강해도 바위나 산모퉁이를 뚫을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가을 날씨는 겨울보다 피부에 닿는 기분이 더 싸합니다. 몸을 덥혀야 합니다. 몸을 움츠리고 잠시 종종걸음을 칩니다. 가끔은 학교를 오가는 길이 길게 느껴졌습니다. 이를 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친구와 달리기를 합니다. 빈 깡통에 돌멩이를 넣고 찌그립니다. 오가는 내내 발길의 노리개가 됩니다. 이마저도 지루할 때는 길옆에 감춥니다. 굴렁쇠도 굴립니다. 마차 바퀴에 쓸 부속품입니다. 대야의 테두리 정도 크기입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빈 수숫대를 잘라 긴 손잡이를 만듭니다. 굴렁쇠를 굴리는 손 역할을 합니다. 사립문을 나서자마자 달립니다. 굴렁쇠가 요동을 칩니다. 울퉁불퉁한 길을 나보다 편안하게 앞설 수가 없습니다.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주인의 호된 재촉에 어느새 학교에 이르렀습니다. 이마의 땀을 훔칩니다. 등이 축축합니다. 방학이 될 무렵이면 굴렁쇠는 길들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넘어지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울퉁불퉁한 길을 잘도 달립니다. 돌부리도 요령껏 넘는 재주를 익혔습니다.

올 추석 무렵입니다. 학교를 지나다 보니 편을 지어 아이들이 민속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비사치기, 제기차기, 딱지치기, 사방치기, 굴렁쇠 굴리기……. 쉬는 시간에 슬그머니 끼어들었습니다. 제기를 찾습니다. 굴렁쇠를 굴렸습니다. 선생님이 손뼉을 쳤습니다.

“할아버지,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어요?”

“연습이지 뭐.”

아이들이 하나둘 나를 마주 보고 줄을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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