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297. 지나가는 비 20231207

by 지금은

지나가는 비를 여우비라고 할까요. 작살비라고 하면 어떨까요? 작살비라고 하면 안 됩니다.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았더니 작살처럼 매우 굵고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말합니다. 비 이야기를 생각하는 중 궁금증이 발동했습니다. 비로 끝나는 단어는 어떤 것이 있을까. 자그마치 5천여 개나 됩니다. 공급 설비, 전신마비, 알 앤 비, 배터리 예비, 현관 로비, 황태자비, 판촉비, 자비, 급전 정보 전송 설비, 긴꼬리부전나비, 호흡 마비, 냄비, 침 분비, 조합비, 꼬래비, 주거비, 허수아비, 상습 변비, 이동비, ……. 위에 나열한 것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비로 시작하는 단어는 자그마치 9천여 개나 된답니다.

나는 종종 공상에 빠지는 때가 있습니다. 아직도 유년기의 마음이 남아있나 봅니다. 먼 길을 걷다가 힘이 들 때면 축지법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한걸음에 목적지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비 이야기를 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마음이 향했군요. 하늘의 반달을 구경하던 중 비가 내렸습니다.

‘해도 달도 있는데 비가 내린다니?’

쨍쨍한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후다닥 물을 뿌리며 건물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의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찝찝한 마음에 머리의 물기를 털었습니다. 손바닥의 촉감이 눅눅하게 느껴집니다. 워낙 빠른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고 보니 혹시 꿈을 꾼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듭니다. 해와 달이 함께 떠 있는 날 이런 광경을 맞이한 것은 처음입니다. 해와 달이 함께 있다고요? 이상할 게 없습니다. 낮에 나온 반달입니다. 하늘에 하얀 구름처럼 떠 있습니다. 밤새 누군가와 함께 놀다가 돌아가야 할 시간을 놓쳤나 봅니다. 한참을 걷다가 하늘을 보니 사라졌습니다. 해님의 눈총이 따가웠나 봅니다. 나도 등이 뜨겁다는 생각에 겉옷 앞자락의 단추를 풀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입니다. 밖에서 놀다가 여우비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여우가 비를 몰고 다닌다고요? 그런 거는 아닙니다. 볕이 나 있는 날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를 말합니다. 드문 일이지만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차례 반복될 때도 있습니다. 이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대기 높은 곳에서 강한 돌풍이 몰아치기 때문입니다. 비구름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나 강한 바람으로 인해 빗방울이 구름이 끼지 않은 맑은 곳까지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름철이 되면 소나기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여우비와 소나기의 차이는 ‘소나기’가 비구름이 있는 어두운 상태에서 내리는 것을 말하고, ‘여우비’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아주 맑은 날씨에 갑자기 잠깐 오고 그치는 날을 ‘여우 시집가는 날’, 또는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공부를 마치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입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나를 향해 달려듭니다. 책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달렸습니다. 논에서 피를 뽑고 있던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비는 뭐 하려고 맞니, 맞을 비나 맞지.”

부지런히 달려 나무 밑에 도착했을 때 비는 이미 개울을 건너 산 너머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아저씨가 기지개를 켭니다. 맞을 비만 맞았나 봅니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듭니다.

비의 종류와 우리말을 연관 지어 봅니다. 개 부심, 건들장마, 그믐치, 는개, 먼지잼, 목비, 악수, 여우비, 웃비, 작달비 등이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면 사전을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참고로 여우별’은 알고 있습니까? 여우비의 반대말로 비나 눈이 오는 날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별을 말합니다.

엄마와 아이가 내 옆을 지나치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와! 저기 달이 있네, 반달이야.”

아이가 내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봅니다.

“엄마, 왜 해와 달이 함께 있는 거야?”

여우비라도 살짝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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