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차림 20231210
모자의 계절입니다.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직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지는 않지만, 틈틈이 엿보고 있습니다. 초순이 되자마자 기온이 곤두박질을 치더니만 어제오늘은 4월의 봄을 불러온 듯 온화합니다. 다음 주가 지나면 곧 추워질 거라는 예보가 있고 보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가려고 했더니만 아내가 두꺼운 옷을 입으라고 성화입니다. 따스해도 겨울이랍니다. 두런두런하다가 절충했습니다. 늦가을 차림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는 해도 역에 이르렀을 때는 덥다는 생각에 앞섶을 풀어헤치고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오고 가는 가운데 수시로 모자를 벗었다 썼다 반복했습니다.
나는 모자가 많습니다. 겨울모자, 여름 모자, 간절기 모자, 세어보지 근 20여 개나 됩니다. 사는 대로 모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빨아 쓰기를 반복하다 보니 버렸으면 하는 게 여러 개나 되지만 정이 들어서 그냥 놔둡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가끔 쓰기도 합니다. 후줄근해 보여 그만 버리라고 하지만 고르고 골라 산 것이라 쉽지 않습니다.
나는 일 년 내 모자를 씁니다. 머리칼이 빠져 앞이마부터 정수리까지 훤합니다. 옆 머리칼도 듬성듬성하여 머릿속이 들여다보입니다. 게다가 일찍 세어져 검은 머리칼이 없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눈썹까지 허옇습니다. 머리를 좀 가려보고 싶은 마음에 모자를 쓰기 시작했고 하나둘 장만하는 가운데 이들이 옷장의 한구석을 차지했습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늙어 가면 외양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표정을 밝게 하려고 해도 주름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지 않던 로션을 발라 봐도 별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모자로 머리를 가리니 좀 나아 보이기는 합니다.
젊었을 때입니다. 누군가 모자 자랑을 하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많은 모자를 다 뭐 하게, 한두 개면 되는데 하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모자보다 더 많지 않을까 합니다.
눈이 불편한 사람도 안경이 많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 경우가 그렇습니다. 멋을 내려고 색안경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눈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구입하다 보니 몇 개 있습니다. 그보다 도수 안경이 여러 개입니다. 어느 날 안경을 찾다가 이곳저곳 살피고 잠자는 것을 하나둘 책상에 올렸습니다. 도수가 맞지 않아서, 안경테가 낡아서, 유행이 지나서 뭐, 이런 이유입니다. 이것 또한 버리지 못했습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는데 모자나 안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간직하고 있다 보면 언젠가 다시 쓸 날이 오겠지. 예를 들면 바지의 통이 넓어지고 좁아지는 것과, 길이가 길어지고 짧아지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요.
‘뭐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상가를 지나다 보면 유난히 모자에 눈이 갑니다. 지금은 책을 볼 때만 가끔 안경을 쓰지만 늘 착용할 때는 모자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안경에 눈이 갔습니다. 지금은 담배를 끊은 것처럼 멀어졌습니다. 눈 수술을 하고 난 이후부터입니다. 백내장이 심해지자 겁나는 것을 무릅쓰고 ‘눈이 구백 량’이라는 말에 중요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수술하고 나니 마음이 가뿐합니다.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오다가 발길이 모자 가게 안으로 향했습니다. 세일이라는 홍보 문구가 눈에 띄자, 마음보다 앞섰습니다. 며칠 지나면 강추위가 엄습할 것이라는 말에 미리 겁을 먹었을까요, 아니면 멋을 좀 부려보고 싶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세일이라는 문구가 나를 현혹한 모양입니다. 나는 그동안 둥근 테의 모자를 고집했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의 모자를 써보았지만, 테가 둥근 모자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가두어버렸습니다. 버킷 모자라 불리는 벙거지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야구 모자를 닮은 챙 모자를 선택했습니다. 두께와 색상 디자인이 마음에 듭니다. 더구나 오늘 입고 간 윗옷과 색감이 어울립니다. 쓰고 거울 앞에 서는 순간 ‘바로 이거야’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러 디자인의 모자가 넓은 매장에 널려 있었지만, 더 돌아볼 마음이 없었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낯선 모자네요.”
“아침에 쓰고 간 모자가 아닌가요.”
시치미를 뚝 떼고 표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내가 즐겨 쓰는 모자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모자는 낯선 것입니다. 날이 추워진다기에 거금을 들여 샀다고 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도 어울립니다. 오히려 내가 쓰는 것보다 더 돋보입니다. 마음에 들며 가지라고 했더니 색감만 다를 뿐 같은 모자가 있다며 내보입니다. 이 겨울을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보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