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앎에 대하여 20231229
‘천 개의 곡조를 다룬 후에야 음악을 알게 되고, 천 개의 칼을 본 후에야 명검을 알게 되듯이 천 개의 시를 쓴 후에야 명시를 알게 되는 것이다.’ 천양회가 한 말입니다.
‘안다’는 게 어디까지일까. 안다는 알다의 활용형입니다. ‘알다’ 의식이나 감각으로 느끼거나 깨닫는다. 교육이나 경험, 사고를 통하여 정보나 지식을 갖춘다.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믿는다. 사전에서 찾은 내용입니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과의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앎의 깊이를 정의한다는 게 쉽지만 않습니다. 정도의 문제입니다. 안다는 게 어디까지일까. 수박 겉핥기식일 수 있고, 과즙은 물론 씨까지 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맛을 보아야 알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박에 대해 모두를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씨앗이 싹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의 한 살이는 어떠할까. 자라는 동안 주변의 환경에 어떤 영향을 받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에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반쯤은 알고 반쯤은 모른다고 말할까요. 문득 ‘얼치기’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때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말입니다. ‘똑똑하지 못하여 탐탁하지 않은 사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치,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섞인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앎의 깊이는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의 생각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조금 나왔는데 쑥 나왔다’는 말처럼 말장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식물의 이름이 쑥이니 쑥이 땅 거죽을 뚫고 모습을 조금 보이든 많이 보이든 나온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조금 아는 것도 안다면 아는 것이요, 많이 아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그냥 말장난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듭니다.
어제는 책을 읽다가 독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어떻게 읽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책 읽기의 갈래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읽는 방법에 따라 다독, 정독, 숙독, 훑어보기……. 읽는 장소에 따라, 책의 종류에 따라……. 나는 책을 읽다가 순간순간 내용과는 관계없는 생각을 떠올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문장의 내용을 지나친 셈이 됩니다. 눈으로 읽기는 했는데 마음이 엉뚱한 곳에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앞뒤의 문맥을 연결하여 가늠하기도 하지만 눈을 고만큼 되돌릴 때가 있습니다. 책을 늘 곁에 끼고 사니 이제는 이런 상황은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여겨지지만, 마음과 행동은 일치되지 않습니다. 시간의 낭비라는 생각에 집중하려고 애쓰지만, 가끔 샛길로 빠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잠시 읽기를 멈춥니다. 호흡하며 책에서 눈을 뗍니다. 집중력이 흩어졌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전에는 백여 페이지나 이백여 페이지를 단숨에 읽었는데 요즘은 삼십여 페이지를 넘기지 못합니다.
끊어 읽기를 하면 좀 나을지 하는 생각에 한 단락을 읽고 나면 잠시 눈을 떼고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탁구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공을 치다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공을 줍고 곧 서브하는 게 아니라 잠시 팔다리를 몇 번 움직인 다음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시작합니다. 내가 이처럼 쉬어 읽기를 하는 이유는 책의 내용을 잘 받아들여 앎의 깊이를 늘리려는 의도입니다.
독서를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한 권의 책을 세 번쯤은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용을 잘 파악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한 번쯤으로는 무심코 지나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미나 흥미로 읽는 것이라면 몰라도 지식을 쌓기 위해서라면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읽은 책 중에는 세 번 반복해서 읽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카뮈의 「페스트」입니다. 코로나19의 전염병이 확산하면서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었습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이 공포에 떠는 것과 초기 대응이 비슷했습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했어도 새로운 사건에 맞서는 일은 늘 어려움이 따릅니다.
앎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를 떠나 한마디로 그 깊이를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천 개의 상황에 접근해 보고 생각해 본다. 그 이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앎을 찾아가는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부딪쳐보아야 합니다.
‘척 보면 삼천리, 툭하면 담 넘어 호박 떨어지는 소리’ 감각적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것도 감각이 아니라 반복으로 알아낸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나의 앎이란 어느 정도일까요. 나 자신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남의 앎을 가늠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선 나의 앎을 시험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생각하는 만큼, 보고 듣고 말하는 등 오감을 총동원하여 기록에 도전합니다. 천 개, 만 개의 글 속에 나를 표현해 보려고 책상 앞에 앉습니다. 앎이란 죽기 전까지 가지고 가야 할 숙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