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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3

331. 벽 20231228

by 지금은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지직 바지직’ 무언가 깨지는 소리입니다. 날씨가 풀려 얼음판에서 발을 굴렀을 때 바닥에 금이 가는 울림입니다. 무슨 소리야, 잠결에도 신경이 곤두섭니다. 냉장고가 잘못됐는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주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아내에게 들은 대로 말했습니다. 냉장고의 상태를 예감했을까요. 곧 확인하더니만 구석에 성에가 끼고 얼음이 얼었다는군요. 깨지는 소리라고 합니다. 얼음조각을 떼어냈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이상이 생겼을지 모른다며 집기를 꺼내고 요리조리 살펴보았습니다.

침실에서 잠이 깬 채 누워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소리가 간격을 두고 소리가 들립니다. 조용한 밤이니 들리는 음이 큽니다. 이대로 듣고만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소리를 찾아 거실로 나왔습니다. 주방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아니군요. 몸을 돌립니다.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현관문 밖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밖에 있는 거니?”

“예”

문을 열었습니다. 아들입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문자가 왔습니다. 일이 밀려 늦게 귀가한다고 했습니다. 늦어도 열두 시에는 오겠다고 하는 마음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어 거실에 불을 켜둔 채 잠이 들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입니다. 지갑을 회사에 두고 왔답니다. 번호를 몇 번 입력해도 문이 열리지 않아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동차에 두고 왔나 해서 가보았다는군요. 혹시 중간에 흘리지 않았나 하는 마음에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도 했답니다.

“문자나 전화라도 하지.”

대답이 없습니다. 피곤한데 밖에서 흘려보낸 시간이 맘에 걸리나 봅니다. 말없이 제 방으로 향했습니다. 잠을 자는 식구를 깨우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늘 배려에 앞장서는 사람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이 달아났습니다. 침대에 눕자,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처럼 추운 어느 날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날처럼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어머니는 대문을 두드리고 흔들며 얼마나 긴 시간을 밖에서 떠셨는지 모릅니다. 아침이면 큰 이불 보따리보다 더 큰 물건을 이고 집을 나서 이 시장 저 시장을 돌며 옷 장사를 하셨습니다. 늘 귀가 시간은 계절과 관계없이 저녁을 훨씬 넘긴 컴컴한 밤입니다. 어쩌다 일이 벅찰 때는 막 자정을 넘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기다리다 그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늦게 저녁밥을 짓는다고 연탄아궁이에 솥을 올려놓고 잠이 든 일도 있습니다. 밥은 물론 나무로 된 솥뚜껑이 검게 타버렸습니다. 냄새를 알아채고 재빨리 부엌으로 다가갔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솥이 붉은 쇳덩이로 변했습니다. 집게로 집어 들었습니다. 엉겁결에 수돗가에 놓고 물을 뿌렸습니다. ‘쉬’하는 소리와 함께 허연 눈을 덮었습니다. 김이 내 얼굴을 스치며 솟아오릅니다.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큰바람이 지나가느라 흔들거리는 걸까,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신발을 끌며 대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벗겼습니다. 그믐달이 흰 눈 위에서 떨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몇 시간이나 팔짱을 끼고 발을 동동 구르고 계셨는지 모릅니다. 손으로 귀를 어루만지며 계셨는지 모릅니다.

“뭐야, 그렇게 깊은 잠에 빠졌던 게야.”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 자거라 하시는 말씀과 함께 내가 너무 늦어서 그렇겠다고 하고 뒷말을 흐리셨습니다. 어느 때는 어머니가 저녁을 굶으셔야 했습니다. 솥이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어머니의 손이 더 바빠지겠습니다. 검게 타버린 솥을 닦아야 합니다. 학교에 가면서 같은 솥이 두 개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내 가방에는 비상 열쇠가 있습니다. 키 번호가 말을 듣지 않을 때를 대비한 것입니다. 열쇠 꾸러미에도 하나가 있습니다. 아들에게 넘겼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만일을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열쇠를 밖의 어느 곳엔가 감춰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마땅한 곳이 없어 지나치고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넘겼으면 문 앞에서 당황하는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 현관의 키 번호를 바꾸었는데 내가 말을 안 한 것인지 아들이 잊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자동차 어느 구석에 감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께도 열쇠를 건네고 싶습니다. 하지만 옛날의 대문은 열쇠의 구멍이 없습니다. 안에서 가로질러 막는 쇠막대기가 자물쇠의 구실을 했습니다. 혹시 가능하다고 해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던져 올릴 수 있다면 모릅니다. 달나라 가는 로켓의 힘처럼 말입니다. 나는 압니다, 내가 열쇠라는 사실을,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그만 어머니를 밖에서 떨게 해 드린 때가 여러 번입니다.

‘이놈아, 졸리면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든가 밖에 나와 체조라도 해야지.’

꾸지람이라도 들으며 등짝이라도 한 번 맞았다면 마음이 덜 아프지 않을까 하는 심정입니다. 어머니,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멋진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열리라 참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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