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22 어느 날

6. 술 20220105

by 지금은

열흘 전에 아들이 와인을 한 병 사가지고 왔습니다. 회사 일이 벅차 늘 늦게 퇴근하는데 그날은 평소보다 이르게 퇴근하겠답니다. 귀가 시간을 알렸기에 함께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우리 식사 시간을 늦추었습니다. 와인의 병마개를 열었습니다. 의외로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병마개를 따는 기구는 있지만 사용한 지 오래돼 서툴렀기 때문입니다. 와인 잔은 늘 싱크대 선반 맨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뭐 우리끼리라도 격식을 차려야지 하는 생각에 평상시 식탁에 놓인 유리잔을 외면하고 와인 잔을 꺼냈습니다.


“그만, 됐어.”


아들과 나는 컵의 삼분이 일, 아내는 그 양의 반을 채웠습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아 어쩌다 드물게 입에 대는 정도입니다. 아들과 아내는 금주나 다름없습니다. 와인에 맞는 안주가 있었지만,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나는 술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술을 먹었던 일을 떠올리면 후회막급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남 앞에 술을 먹은 티를 내보인 것은 삼촌의 결혼식 날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술을 먹었다는 것을 알린 날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입니다.


음식 만드는 일을 구경할 때입니다. 동네 어른 몇 분이 부침개가 맛있어 보인다며 막걸리를 함께 곁들였습니다.


“너도 한 잔 먹어볼래.”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셨습니다.


“안 돼,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짓궂은 아저씨 한 분이 표주박을 내밀었습니다.


잠시 후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서너 모금 마셨을 뿐인데 기분이 야릇해집니다. 술에 취하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에 어른들 흉내를 내고 싶었습니다. 사립문을 나서자 일부러 몸을 비틀비틀했습니다. 덥다는 생각뿐 몸과 마음은 멀쩡합니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재, 왜 그런데.”


그렇게 술 먹은 티를 냈습니다.


나는 그 후에도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말입니다. 춘궁기에는 끼니를 건너뛰는 일이 많았습니다. 끼니 대용으로 가끔 술지게미를 먹을 때가 있었습니다. 막걸리를 거르고 난 찌꺼기입니다. 먹을 것은 부족해도 조상을 위하는 마음은 있어 명절 때나 제사 때가 되면 밀주를 준비했습니다. 어느 책에선가 주인공이 술지게미에 취한 채 학교에 갔다는 일화를 읽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술에 취해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선생님께 혼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음주입니다. 술을 먹을 자리를 되도록 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술자리에서도 예의상 꼭 한잔만 해야겠다고 다짐했으나 막상 함께하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술에 약한 나를, 술이 나를 삼키곤 했습니다. 음주를 한 다음 날은 하루 종일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익숙지 않는 술에 속이 울렁거리고 쓰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남과 다투는 일은 없었지만 내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일이 생기곤 했습니다. 아내에게도 가끔 보이지 않아야 할 꼴도 보였습니다. 참지 못하고 토하는 경우입니다. 아내는 내색하지 않았어도 나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와인이 그대로 있네요. 아버지가 마저 드신 줄 알았는데.”


어제저녁에 물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어본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뭐 술을 좋아하나.”


아들은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병마개를 열었으니 빨리 먹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둔 후로 제일 좋은 것은 술에서 해방된 일입니다. 먹을 만큼 먹고 안 먹을 만큼 먹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근래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군것질입니다. 삼시 세끼 외에는 입에 대는 것이 별로 없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처럼 돼버렸습니다. 내 군것질은 늘 견과류입니다. 책을 보다가 땅콩에 손이 갔습니다. 집어봤자 한두 알이지만 하루에 네댓 번입니다. 땅콩을 집자 갑자기 와인이 머릿속에 들어왔습니다.


“여보, 남은 와인 처치해야지.”


“당신이나 한 잔.”


컵에 반 정도를 채웠습니다. 입술을 적십니다. 홀짝거리는 동안 시간이 흘러갔나 봅니다.


“양조장 망하겠어요.”


참새가 소에게 말했단다.


‘내 고기가 네 고기보다 맛이 있다고’


시골에서 겨울철이면 참새를 잡아 구워 먹은 일이 생각납니다. 내 경우는 참새의 말이 맞습니다. 살점이 없으니 늘 맛을 보다 말았습니다.


와인, 맛없다. 술 더 맛없다. 홀로 잔을 기울이는 것은 더더욱 맛이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22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