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픈 나무 202210106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오후의 바깥 활동이 며칠 사이에 바뀌었습니다. 수영 때문입니다. 일월부터 수영하러 문화회관에 갑니다. 나는 전철역까지 가는 동안 연이어진 아파트 사이 길을 따라갑니다. 엊그제의 모습입니다.
‘뭐야, 나뭇가지마다 뭉텅 잘려 나갔잖아.’
역전 가까운 아파트를 지나칠 때 길게 늘어선 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빨라진 발걸음에 별생각 없이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수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무와 또 눈이 마주쳤습니다. 시간이 넉넉해서였을까. 발걸음이 무뎌졌습니다. 잘린 가지의 둥치마다 눈길이 꽂힙니다. 이 추운데 얼마나 아플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사람이나 나무나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우받으며 살아가는 사람,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 그들은 출발점이 같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나무는 건강이 염려된다고 주사를 맞습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지 말라고 소독 세례를 받기도 합니다. 목이 마를 것 같다고 물주머니를 달아주기도 합니다. 그뿐인가 요즈음같이 추운 계절에는 몸을 보호하라고 볏짚이나 천으로 몸을 감싸주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금수저인가, 금지옥엽인가.
내가 잠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나무들은 아파트가 생기면서 베란다 가까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맨 아래층의 베란다를 가려주기 위한 목적인 듯싶습니다. 여름철이면 나는 이 길을 좋아합니다. 길은 좁지만, 양옆으로 늘어선 나뭇잎들이 햇빛을 가려주어 시원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백여 미터 남짓입니다. 짧기는 하지만 마음속의 오솔길입니다.
이 나무들이 수난을 겪었습니다. 오로지 베란다 쪽의 나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아픔의 상처를 안았습니다. 단지 자리를 잘못 잡은 이유입니다. 하필이면 베란다 쪽이 뭔가. 댓 발작만 물러났어도 몸을 잘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왜 잘렸을까,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나무와 아파트를 눈여겨보았습니다. 모두가 활엽수입니다. 가지가 아파트의 창을 가려서, 아니 창문을 건드릴까 봐. 이삼 층의 조망을 흐리게 할까 봐.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서 꺼내려다 그만두었습니다. 미루는 습관 때문입니다. 나중에 찍으면 된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요즈음 나무에 관한 그림책을 구상 중입니다.
‘얼마나 아프고 괴롭겠니.’
한 장면으로 고통을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다소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가을이나 봄이 되면 고통을 받는 것은 이곳의 나무뿐만 아닙니다. 시련을 겪는 대표적인 경우는 대로변의 가로수입니다.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가지가 무자비하게 잘립니다. 요즈음은 같은 길을 걸어도 삭막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몸통만 눈에 들어오니 비정상으로 보입니다. 장승이나 망부석을 연상케 합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수년 동안이나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뻗어낸 가지가 어느 순간에 몽땅 잘립니다. 같은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나무들이 산골에서 태어났다면, 아니 도시로 오지 않았다면 이런 아픔과 볼품없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사람이 만들어 낸 욕심의 결과입니다.
내일은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꼭 담아야겠습니다. 제일 아파 보이는 나무로…….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위로가 전부는 아닐 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