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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28. 그 길 20220319

by 지금은

그 길을 걷자고 했습니다.


봄이면 꾀꼬리가 노래했습니다. 소쩍새가 울었습니다. 산비둘기, 산까치, 명새, 오목눈이, 방울새, 굴뚝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새의 몸짓과 구애의 목소리가 산골짜기를 울렸습니다. 산은 연둣빛입니다.

친구의 성화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중간지점입니다.


“개천사까지 가려면 다섯 시간을 걸린건디.”


“무슨, 두 시간이면 충분할걸. 뭐.”


“인마, 네 걸음으로 말하는 거여.”


우리는 고향을 무기 삼아 칠십 년 이상을 함께 우정을 이어왔으니 무슨 말에도 크게 오해 살 일은 없습니다. 아직도 철부지 때의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이입니다. 버스는 티끌 하나 날리지 않고 제 갈 길로 달아났습니다. 옛날의 신작로는 어느새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발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 없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신작로의 일부 구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산판을 오가는 트럭이 신작로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면 우리는 신이 나서 그 길로 뛰어들곤 했습니다. 뽀얀 흙먼지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잠깐 짙은 안갯속에 갇힌 것처럼 우리의 모습을 감추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먼지가 걷히고 나면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머리칼입니다. 검은 머리가 금세 잿빛으로 변했습니다.


친구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트럭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여.”


한 친구가 빨리 걸을 것을 재촉했지만 그는 슬며시 미끄러져 개울가로 내려섰습니다.

“여기서 검정 고무신 띄우고, 버들치, 버들치, 메기, 뱀장어를 잡았지!”


“자식아, 갈 길이 바쁘단 말이여.”


“야, 정순이 생각 안 나니, 발가벗고 함께 미역 감았잖아. 네 애인 말이여.”


우리는 친구를 뒤로한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도 뒤를 따라 걸었습니다. 부자연스러운 발걸음입니다. 잠시 그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내 옆으로 따라붙었습니다. 무릎이 불편해 뒤뚱뒤뚱 걸으면서도 여전히 주위의 경치에 취했습니다. 변사처럼 자신의 어릴 적 있었던 일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 중입니다. 아니 동영상을 풀어놓는 중입니다. 한 시간 남짓 걸었나 봅니다. 그가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합니다. 뼈 있는 말을 잘하는 친구의 말속에 짜증이 섞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자기 걸음으로는 십여 분 거리랍니다. 점심때가 가까워져 오는데 언제 가서 점심을 먹겠느냐고 투덜댔습니다.


“매일 먹는 점심인디 한 끼 빠뜨렸다고 죽는담.”


그는 미소로 대답했습니다.


갈림길에서 콘크리트로 지어진 다리를 건넜습니다. 옛날에는 징검다리였다고 다들 알고 있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잠시 돌다리에 숨은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마가 지거나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무용지물이라고 했습니다. 추운 날 수레가 물을 튀기고 지나가면 얼음이 징검다리를 덮었습니다. 자칫 방심을 했다가는 미끄러지기 십상입니다. 낙상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는 금방 일어날 일처럼 조심에 조심해야 한다며 그때 일이 코앞에 닥친 것처럼 강조했습니다.


“사 학년 때 있지, 엄청 추웠던 날. 난로 당번이라 장작더미 짊어지고 학교에 가다가 요기쯤에 있던 돌을 딛다가 미끄러져 그만 물에 주저앉았어. 내 옷이 어떻게 되었겠나. 교 실에 먼저 온 놈들은 나를 빤히 보면서도 난로를 양보하지 않았어. 뒤늦게 온 재순이가 내 꼴을 보고는 애들을 삽시간에 난로 밖으로 밀쳐내고 나를 난로 앞에 세워주었지. 다섯 살이 많으니 누나 같기는 했지만 말이야. 졸업하고 이 년인가 있다가 시집갔잖아. 댕댕이에서 착 한 마음씨만큼 잘 살고 있어.


“어찌 그리 잘 안담.”


“동기 동창인디 모르면 쓰남, 명재와는 육 학년 때부터 서로 눈이 맞았대요. 우리보다 일곱 살은 많았지. 신랑 신부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친구여.”


“음, 그래 맞아. 장구목에서 다니던 형. 그 양반보다도 한 살이 더 많은 정래도 있었지. 집 이 멀어서 지각을 많이 했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동창회 모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동기동창이라며 친구 대부분이 반말을 하고 형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고 화가 단단히 났다고 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우리 형님이 그 친구보다도 세 살이나 아래입니다. 철없을 때는 그게 뭐 대수냐고 했는데 어느새 우리들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동창은 어쩔 수 없지만 나이로 보아 형님 대우를 했어야 맞는 거라고 서로 맞장구를 쳤습니다.


“시내로 나가는 길에 명재 형한테 들러볼까.”


“그만둬라, 무슨 무안을 받으려고.”


옆에 있던 친구가 예전에 찾아갔다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염려가 되기는 하지만 한 번쯤은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내가 공을 차다가 발목을 삐었을 때 집까지 업어다 주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중간쯤에 이르자 내리려 했지만, 나뭇짐보다 가볍다며 우리 집 마당에 도착해서야 내려주었습니다. 나을 때까지 조심할 것도 당부했습니다. 그때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아른합니다.


골짜기로 들어섰습니다. 전체적인 모습은 옛날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변한 것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물의 양이 대폭 줄었습니다. 개울은 잡초로 뒤덮였습니다. 물길을 따라 한옆으로 길게 줄지어 있던 미루나무는 흔적조차 없습니다. 일 학년 식목일 날 꺾꽂이한 미루나무가 우리와 함께 자라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연의 높이만큼 자라났습니다. 우리도 저만큼 자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친구의 말도 기억납니다.


“내 그림자도 그만큼 커지는 거 아닌감.”


“그게 아니고 키가 그만큼 커졌으면 좋겠다는 거지.” 마음씨만큼 잘살고 있어.”


“그만둬라. 방에는 어떻게 들어가고 교실은 어떻게 하고, 밖에서만 지내야 하지 않겠니.”


“네 말이 맞기는 맞는디.”


그와 사돈인 친구는 또다시 핀잔입니다. 언제 갈 것이냐, 점심은 어떻게 할 거냐, 배고파 죽겠다고 다시 짜증을 부렸습니다. 내가 한마디 했습니다.


“사돈인디 다투지 말어. 남 보기에 남세스러워요.”


느긋한 친구는 다시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뭐 싸울 일이 있느냐는 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친구는 웬만한 말은 다 소화합니다.


“세상살이가 뭐 다 똑같은감. 달라도 그냥 함께 사는 거여. 나는 막걸리 체질인디 우리 마 누라는 양주 체질이여”


“뭐 하는 거여, 부지런히 걸어.”


그의 사돈이 저만치 앞서가다 되돌아보며 소리쳤습니다. 두 시간이면 간다고 해놓고 해 넘어가겠다고 우리의 눈치를 보며 또 재촉했습니다. 배가 고파 눈이 십리는 들어갈 지경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고픕니다. 친구의 말대로 오늘 점심은 마음으로 점을 찍었습니다. 성화에 못 이겨 걸음을 빨리하는 친구의 입에서는 아직도 이야기가 쏟아져 내립니다. 배고파 입이 떨어지겠느냐는 말에 중언부언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허기를 잊게 마련입니다. 친구는 완전히 향수에 젖어버렸음이 틀림없습니다.


골짜기를 지나고 언덕에 발을 딛고 산봉우리를 타고 넘으며 이를 잡듯 어린 길을 더듬었습니다. 사돈 친구의 예측이 맞았습니다. 두 시간 거리를 여섯 시간 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가장 멀고도 가까운 길을 걸었습니다. 사색을 좋아하는 친구가 말했습니다.


“너는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을 걸은 거구먼.”


산사 근처의 친구 집에는 이른 저녁상이 차려졌습니다.


“밥이 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먼, 차린 지 오래됐어. 기다리다 눈 빠지는 줄 알았어.”


“고마워.”


“빈말은 나중에 하고 어서 먹어,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음식이 입맛에 맞을는지 모르겠구 먼.”

초가지붕에서 함석지붕으로 바뀐 고향 친구의 음식점입니다. 비빔밥 속에는 아직도 식지 않은 지난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산나물, 들나물, 살구꽃, 찔레꽃, 호도 반쪽, 밤 한 톨, 토종닭이 낳은 달걀,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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