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처음도 끝도 20220324
반가운 분이 있습니다.
엊그제 복지관에 부탁한 책이 있어 찾으러 가는 중이입니다. 공원을 가로질러 가려고 입구에 들어섰을 때 개나리 한 줄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칙칙한 줄기들의 무리 중에 유독 한 그루만 노란색을 띠고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꽃망울이 통통 부풀었습니다. 내일이면 곧 터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위의 개나리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이들은 아직 봄을 맞을 준비가 덜 됐나 봅니다. 아무래도 이놈만 속도위반하겠다 싶습니다. 내 예상이 맞았습니다. 그만 개나리 생각을 잊고 있었는데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다음날 잠시 머리를 식힐 겸 그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봐, 저기 벌써 개나리꽃이 폈나 봐.”
나보다 먼저 꽃을 발견한 여인들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가더니 신기한 듯 바라봅니다.
“급했나 봐, 속도위반이네.”
“그러게.”
“너 닮았나 보다 얘.”
“뭐가.”
“네 아들 말이야, 칠삭둥이라며.”
“계집애, 그렇기는 해도 개나리와 비교할 게 뭐니.”
“네 아들 생일이 아마 이때쯤이지?”
그들은 내가 뒤에 있는 줄을 몰랐나 봅니다. 힐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성급하게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는 지금 홀로 활짝 핀 꽃을 바라고 있습니다.
‘봄은 봄이구나.'
바람이 얼굴을 스칩니다. 전 달과는 다른 느낌의 바람입니다. 아직은 머플러를 목에 감고 나오기를 잘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얼굴 대신 목덜미가 서늘할 것입니다. 주위의 개나리 줄기들을 빙 둘러봅니다. 꽃망울이 조금 도톰해지기는 했어도 얼굴을 활짝 내밀려면 더 기다려야 합니다. 왜 이 줄기만 먼저 꽃을 터뜨렸을까. 자신을 자랑하고 싶었을까. 세상을 먼저 보고 싶었을까.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괜한 생각을 했나 봅니다. 쉽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단지 이 개나리 줄기는 꽃을 먼저 세상에 내놓을 환경이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나는 미련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주위의 개나리를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햇볕이나 공기를 받아들이는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미세한 상황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이 세상의 생물들은 일정한 생애의 주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그 안에서 삶을 성숙시켜 나갑니다. 사람으로 치면 유년기, 사춘기, 갱년기, 노화기 등입니다. 이 기간 변화에 변화를 거듭합니다. 사람에 따라 사춘기가 먼저 오기도 하고 나중에 오기도 합니다. 갱년기나 노화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개나리는 자기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아닐까. 봄이 왔음을 먼저 알리는 한 줄기의 개나리꽃에 사람의 시선이 감탄사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나는 벼에도 올벼가 있듯 이 개나리를 올된 놈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벚꽃의 향연이 시작됩니다. 제주도에서부터 개화를 시작으로 바다를 건너 서울에 이를 것입니다. 그동안 해마다 많은 인파 속에 진해의 벚꽃, 월미산의 벚꽃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 축제가 줄을 이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특별히 축제를 열지 않는다는 소식입니다. 작년에도 그랬습니다.
나는 자연의 변화하는 모습과 동식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날이 따스해지면 내 발걸음이 분주해질 것입니다. 뉴스에 벚꽃 이야기가 시작되면 벚나무가 점점이 박혀있는 앞산으로 가는 횟수가 늘어납니다.
어느 날 나는 홀로 피어난 개나리를 발견한 것처럼 벚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게 분명합니다.’
개나리 고운 꽃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아기는 사알짝 신 벗어 놓고/ 맨발로 한들한들 나들이 갔나/ 가지런히 기다리는 꼬까신 하나.
내가 먼저 안 꽃은 벚꽃보다 개나리입니다. 저학년 때의 일입니다. 개나리가 필 무렵 배운 ‘꼬까신’을 풍금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선생님의 커지는 목소리에 맞추어 교실이 떠나가도록 목청을 높였습니다. 아직도 가사를 잊지 않은 것을 보면 많이 불렀음이 틀림없습니다. 올해는 벚꽃만큼이나 개나리도 사랑해야겠습니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가듯 그의 동료들보다 일찍 피는 꽃은 신기합니다.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늦게까지 남아서 피는 꽃이라고 해서 눈에서 멀어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작년에는 겨울이 오는 줄 모르고 제 홀로 얼굴을 감추지 않은 개나리꽃을 보았습니다. 용기가 있는 건지 철부지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늦은 가을을 초봄으로 착각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석양에 담긴 꽃의 색깔이 더욱 곱게 느껴졌습니다. 끝까지 끝을 지킨다는 것이 때로는 애처롭게 느껴지기는 해도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두루두루 관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일찍 찾아오는 자식이 반갑기도 하지만 밤늦게 돌아올 녀석을 기다리는 마음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