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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Oct 31. 2024

2022 어느 날

36. 언제 이럴 줄 알았나. 20220419

딱새도 박새도 아팠겠습니다.


머리를 박았습니다. 이마에 피가 났습니다. 아픕니다. 저녁 무렵 화장실에 들어가다 문기둥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어이쿠.”


나도 모르게 손으로 문기둥을 밀었습니다. 머리가 잠식 띵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왼쪽 이마에 피딱지가 새끼손톱 길이만큼 맺혀있습니다. 손이 다가가자 아픈 느낌이 듭니다. 보아야 안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세수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거울을 보고 나서야 살아나다니, 차라리 거울을 보지 않았다면 아직도 아픈 느낌이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물체의 모서리에 부딪히는 일이 점차 늘어납니다. 작년에도 몇 차례 비슷한 일이 있었고 올해도 두 차례나 몸을 부딪쳤습니다.

‘눈이 구백 량이라는데.’


이럴 때마다 혹시라도 얼굴 특히 눈을 다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몸 어느 구석이라고 중하지 않은 곳이 없겠습니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몸이 둔해지고 주변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순발력이 떨어집니다. 얼굴은 드러내놓는 것이 일반적이니 아픈 것도 염려되지만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되어 언짢습니다. 얼굴에 상처라도 입게 되면 나를 보는 상대는 좋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누구와 싸운 거야, 얼마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면 이 나이의 얼굴에 상처를 입어.’


젊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축구하다가 얼굴을 다쳤습니다. 달려가면서 공을 다투는 과정에서 아이의 발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고의성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상처 부위가 넓었습니다. 경기에 열중하다 보니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맨땅이라 눈 주변에 멍이 들고 볼은 긁힌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상처가 아물고 딱지가 떨어지기까지 남과 마주칠 때마다 불편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내가 한동안 섬 생활을 할 때입니다. 관사는 산기슭에 자리했습니다. 바닷가를 향한 시야는 멀고 넓었습니다. 집에 비해 큰 창문이 맘에 들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도 밖이 훤히 내다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창문을 사랑했다기보다 바깥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늘이 머무는 공간에는 시시각각으로 변화가 찾아오고 머물렀습니다. 색깔이 다른 태양이, 다양한 모습의 구름이, 소나기가, 부슬비가, 안개가, 낮에 나온 반달까지. 밤이면 검은 어둠이, 별들이,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이 찾아와 나와 인사를 나누고 잠시 머물렀습니다.


나를 찾아오는 것은 이 밖에 소리도 있습니다. 봄을 알리는 것에는 꽃 못지않게 새소리도 있습니다. 산기슭의 집은 새들의 놀이터입니다. 나의 게으름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새들은 먼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창가의 나무를 찾아와 재잘거리곤 했습니다. 귀가 시끄럽습니다. 서로 다른 새들이 어울려 목청을 돋우다 보니 가끔은 불협화음이 들리기도 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차례로 말해야지.”


내가 마치 새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중얼거리며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조용한 새벽공기에 놀랐을까. 창문에 기대설 듯 자리한 나뭇가지까지 다가와 구애의 몸짓으로 노래하던 새들이 옆의 나무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잠시 조용했던 틈을 메우려는 듯 다시 지저귐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왔습니다. 햇살은 봄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집 주변을 온기로 감싸고 있습니다. 손을 씻어야겠다고 대야에 손을 담그려는 순간 창문 아래 새 한 마리가 눈에 뜨였습니다. 한 발짝거리에 배를 드러낸 채 두 발은 하늘을 향해있습니다. 딱새입니다. 손이 가까이 다가가도 죽은 듯 움직임이 없습니다. 나는 살그머니 새를 손바닥에 올렸습니다. 내 체온에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뭐야,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다른 무엇, 인가로부터 공격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기슭으로 멀리 던져버릴까 하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창틀에 살며시 올려놓았습니다.


오후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제일 먼저 창가로 눈이 갔습니다. 잠시 잊었던 새의 모습이 되살아났습니다. 아무래도 나무 밑에 묻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천천히 뜰을 지나 창가로 다가갔습니다.

없습니다. 새가 없습니다.


고양이가 물어갔을 리도 없고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죽은 새가 사라지다니. 외딴곳에 자리한 집에 접근할 사람은 나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일 년에 두세 차례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사건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새들이 유리를 인식하지 못해 일어난 사고입니다. 투명한 창이 새들에게는 장벽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빠르게 날다 보니 피할 사이도 없이 창에 머리를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발생한 뇌진탕이라 여겨집니다. 멍청한 촌놈입니다. 유리를 몰라보다니. 나는 이후로 집을 비워야 할 경우에는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습니다. 방 안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유로 가끔 새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새에게는 놀이터를 제공한 셈이 되었습니다. 새장 안의 새를 보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나는 새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새에게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먹이를 주고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상처를 가리기 위해 모자를 썼습니다. 마스크는 기본입니다. 코로나 전염병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완전 방어입니다. 누군들 내 이마에 상처를 알아차리겠습니까.


‘도시에 사는 놈이 유리 벽을 모르다니.’


나는 공원으로 가기 위해 큰 건물을 지나가다 바닥에 떨어진 박새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섬에서 발견했던 모습 그대로 배를 드러낸 채 두 다리는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낙상했음이 분명합니다. 새를 한적한 계단의 모서리에 놓았습니다. 오십여 미터를 갔을까 또 한 마리가 바닥에 떨어져 옆으로 누워있습니다.


‘에이, 도시에 사는 놈치곤 헛똑똑이구먼.’


돌아오는 길에 보니 한 마리는 날아갔고 한 마리는 제자리에 머물러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옆의 화단에 묻어주었습니다. 내 이마에 무심코 흙 묻은 손이 올라갔습니다.


‘나는 뭐야.’


그 후 나도 건물의 출입문 유리 벽에 코를 살짝 부딪친 적이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가다 일어난 일입니다. 문득 새 머리나 내 머리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수리 연이라도 날려볼까요.


조심하고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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