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은 Nov 01. 2024

2022 어느 날

43. 마련하지 못한 은신처 20220509

나를 숨길만한 똑 부러진 은신처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못마땅한 일이 있거나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을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어입니다.


‘은신처’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에 담아보지 않았을까 합니다. 나라고 해서 뭐 다를 수 있나, 갑자기 질문을 받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 한때 나를 숨기고 싶거나 숨겨야 할 경우 슬며시 골방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한낮에도 컴컴하고 작은 방으로 식구들의 왕래가 드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실내에는 제사 때 쓰는 물건을 비롯하여 평소에 자주 쓰이지 않는 것들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때가 되면 누군가가 나를 찾아내겠지, 생각했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안 식구들은 나에 대해 관심 밖이었을까요. 어른들은 내 행동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몸을 숨겼지만, 또 스스로 몸을 보여야 했습니다. 내가 밖의 은신처에 관심을 가진 것은 모험 동화를 읽으면서부터입니다. 밖이라면 뒤란의 굴뚝과 굴뚝 사이, 대나무 숲, 뒷동산, 가지가 많은 큰 나무 위……. 여러 곳에 은신처를 마련했지만, 친구들과의 놀이 장소로 사용되는 외에는 별 효용 가치가 없었습니다. 나를 찾는 사람이 있어야 은신처로 재미가 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여러 날을 숨어있다고 해서 찾아 나설 사람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몇몇 날이나 얼굴을 감춘 것도 아닙니다. 길어야 반에 반나절이지 그 이상은 좀이 쑤셔서 숨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가출이라는 생각은 몇 번으로 족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을 때, 아내와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었을 때, 가출을 꿈꾸었지만, 생각일 뿐 정말로 실행한 일은 없습니다. 내가 떠나면 어머니의 마음은, 아내의 마음이……. 내 불안보다 상대방의 걱정이 앞섰습니다. 나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은신처를 찾기보다는 모든 것은 내 안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은신처를 찾는 것은 비겁하다는 마음이 행동보다 앞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스스로 극복해 가자는 생각입니다.


‘은신처’


나에게는 은신처가 없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젓습니다. 뭐 그게 은신처냐고 반문하겠지만 내 몸과 마음이 곧 숨을 곳입니다. 나는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쉼 없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립니다.


‘두 곳의 은신처’


우선 마음의 은신처는 책입니다. 책이 좋은 이유는 그 속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내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습니다. 착잡한 마음을 외면하거나 천천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라는 대답을 많은 사람으로부터 유도해 낼 수 있습니다. 책 속에는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습니다. 소설 속에는 수많은 사람의 삶이 서려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생각과 행동들이 펼쳐집니다. 등장인물들의 성공한 삶, 실패한 삶은 나에게 교훈의 기회가 됩니다. 평범한 삶도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줍니다. 성공한 삶이라고 해서 나에게 꼭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실패한 삶이라고 해서 나에게 실패를 안기는 것도 아닙니다. 시대나 환경, 개개인의 개성에 따라 행복의 조건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과 몸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꼭 노동과 결부 지을 수는 없습니다. ‘몸의 은신처’를 말하라면 손과 발입니다. 손과 발은 생각에 따라 움직이지만, 건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손발이 바쁜 만큼 생각도 바쁩니다.


‘혼자 있어서 심심하다고.’


그럴 시간은 별로 없습니다. 심심한 사람은 늘 심심합니다. 만나는 사람이 많으면 좀 심심하지 않을까. 심심한 사람은 혼자 있어도 심심하고 여럿이 함께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몸과 마음이 바쁜 것 같기는 한데,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감정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동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은신처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은신처를 찾아가느냐고. 마음먹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나는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 무료하다 싶을 때 나는 가만히 ‘멍’ 때리는 대신 걷기를 택합니다. 호젓한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무아(無我)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어 나타나는 것은 평상심입니다. 다음에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것저것에 손이 갑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글을 한 편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완성되면 좋고 미완성이어도 좋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남겨둔 셈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자판을 두드리게 됩니다.


다음은 그림입니다. 물감을 내놓거나 색연필을 꺼냅니다. 이마저 귀찮다 싶으면 삼색 볼펜을 손에 들기도 합니다. 마음이 썩 내키면 큰 스케치북, 그렇지 않으면 작은 스케치북, 때로는 엽서 크기의 메모지를 펼치기도 합니다. 그림을 보며 씩 웃었습니다. 자화자찬입니다. 제멋에 겨워 식구들에게 평을 청해봅니다. 핀잔이라든가 ‘피식’ 웃어넘기는 모습은 개의치 않습니다. 생각지 않은 좋은 반응에는 또 다른 화면이 기분을 읽기라도 한 듯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이날이 다가옵니다. 색종이 상자를 열었습니다. 접어놓은 작품이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책장 한 구석에 놓여있는 색종이 묶음을 꺼냈습니다. 올해는 장난감 아코디언과 꽃 공을 만들어 꼬마들에게 주면 좋겠습니다. 일주일 정도 접으면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안녕”


“색종이 할아버지다.”


어색하지 않게 말을 나눕니다.


올해는 노인회관에서 직원이 어버이날을 맞아 축하한다며 카네이션을 내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색종이 할아버지다’ 말하는 꼬마한테 초콜릿 선물을 한 개 받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내가 꽃을 만들어 어른들께 선물을 했을 터인데, 이제 카네이션은 만들지 않습니다. 내 나이가 어느새…….

다음 은신처는 음악입니다. 노래는 내세울 게 전혀 없고 악기는 뭐 이것저것 만지지만 내놓고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음악 감상은요 하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곡명을 많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신 감흥에 젖는 경우가 있습니다. 계절에 맞는 음악을,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을 선별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안식처로 이만한 것도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뾰쪽하게 내세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스스로 내 안의 은신처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잘하는 것은 없어도 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고 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나의 큰 단점은 남이 손을 내밀기 전에는 선 듯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내향적이라고 말하면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에는 나에게는 책이라는 은신처 못지않게 광장의 은신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은신처, 그게 뜻대로 마련되지 않습니다. 어느덧 내 곁의 사람들은 소식을 멀리한 채 하나둘 멀어지고 떠나가는 데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생각해 볼 일입니다. 백 세 시대에 또 다른 은신처를 하나 마련해야 할지 따져 볼 일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