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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Nov 01. 2024

2022 어느 날

42. 그림자 20220501

깜짝 놀랐습니다. 검은 물체가 쥐보다 빠르게 내 발등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순간적으로 발걸음이 주춤했습니다. 몸이 오싹해집니다.


‘분명 쥐는 아니고 뭐지.’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주위는 대낮같이 밝습니다.


나는 지금 운동하는 중입니다. 컨벤시아 앞의 넓은 마당에서 타조처럼 발걸음을 옮기는 중입니다. 회색과 검은색의 이방 연속무늬가 바둑판처럼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시멘트 벽돌입니다. 나는 그 위의 회색 줄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몸을 돌려 되돌아온다면 이번에는 검은 줄입니다. 너른 마당 가에 듬성듬성 서 있는 방범등이 내 그림자를 앞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보호하기라도 하려는 듯 뒤따르기도 합니다. 내 발끝과 연결된 그림자의 끝은 결코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처럼 찰거머리처럼 붙었습니다. 풀로 붙여놓은 것도 아니고 끈으로 매어놓은 것도 아니지만 떨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동행합니다.


내가 회색 보도블록에 막 발을 디딜 때 분명 검은 물체가 내 발등 위를 스쳤습니다. 잠깐 몸서리를 치고 앞으로 나갔지만, 머리칼이 쭈뼛하고 몸이 순간적으로 서늘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조금 지난 후에야 짐작이 갔습니다.


‘새’ 그렇습니다. 밤의 새입니다. 흔히 알고 있는 부엉이, 올빼미,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 주변에는 이런 새가 살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닙니다. 아니면 뭘까. 공중을 날아가는 검은 비닐봉지, 다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무엇엔가 놀란 새일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시골에 살 때 가끔 목격되는 일이었습니다. 밤길을 걷다 보면 주위의 나무에서 있던 새가 인기척에 놀라 갑자기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가 놀라서 하는 행동이지만 사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입니다. 이유도 없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림자를 떼어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 끝 목적지에 이르기까지는 참아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정한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생각이 앞서자, 발걸음도 따라서 빨라졌습니다. 드디어 끝 지점을 찍고 건물의 추녀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건물의 큰 그림자가 나를 삼켰습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서자 밝은 빛이 벽을 비추고 있습니다. 벽에 다가가자, 내 그림자가 벽에 붙었습니다. 벽을 마주 보고 섰습니다. 내가 두 손을 올리자, 그림자도 손을 올렸습니다. 나는 지금 생각지 않은 행동을 하는 중입니다. 내 그림자를 놀리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그림자가 흉내 내기 바쁩니다. 숨이 차오르자, 움직임이 둔해졌습니다. 그림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내 움직임만큼이나 느려졌습니다. 늦은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방범등은 오롯이 내 모습을 벽에 비춰줍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겨울철 긴긴밤이면 우리 식구들은 가끔 그림자놀이를 했습니다. 윗목 한구석에 놓았던 등잔걸이를 아랫목 중앙에 옮기고 윗목 벽으로 눈을 고정했습니다. 고모의 말에 따라 한 사람씩 지명된 동물이나 물체를 벽쪽을 향해 등잔불 가까이 했습니다. 체육 시간에도 그림자놀이를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하던 방법과는 다릅니다. 운동장에서 편을 갈랐습니다. 원을 그려놓고 원 밖으로 나와 상대의 그림자를 밟아 자기 원으로 데려가는 경기입니다. 먼저 나온 사람은 쫓기고 나중에 나온 사람은 쫓아가 그림자를 밟습니다. 잡히지 않으려고 자기 원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때는 나무 그늘로 숨기도 합니다. 수업이 끝났을 때는 대부분 친구가 땀에 흠뻑 젖곤 했습니다.


자연 시간에 계절의 변화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해의 길이가 길어지고 짧아짐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도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태양이 물체와 가까울 때와 먼 때 그림자의 길이가 다름을 전구와 지구본을 놓고 알려주셨습니다.


“밤에 해보면 좋겠구먼, 모두 학교에 모일 수는 없으니, 숙제다.”


나는 숙제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그 후에도 친구들과 달밤이면 동네 바깥마당에서 그림자놀이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추석 무렵입니다.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한밤중입니다. 달빛이 창호지 문을 뚫고 방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보름달은 반가운 듯 나를 감쌌습니다. 우리 집을 비롯한 온 동네는 풀벌레의 낮은 소리뿐 조용합니다. 내 인기척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정적이 흐릅니다. 달 아래 있는 앞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두엄더미에 볼일을 보는 순간 학교에서 배운 그림자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마당에서 바람벽에 가까이 가기도 하고 뒷걸음질을 치며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았습니다. 늑대, 여우, 오리, 소, 산, 나무…….


‘이게 아닌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나와 달의 거리는 내 그림자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은 깜깜한 방안에서 등잔불이나 촛불을 뒤에 두고 그림자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플래시가 있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공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가로등 사이로 특이한 전등 하나가 나를 멈춰 세웠습니다. 전등에서 쏟아진 글자와 둥근 그림자가 내 앞에 빙그르르 움직이고 있습니다.


‘코로나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비껴갈까 하다가 발을 슬그머니 원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림과 글씨가 내 발 위를 덮습니다. 내 몸이 원 안으로 들어가자, 그림과 글씨들이 내 몸을 에워쌌습니다. 잠시 원 안에 갇혔습니다. 검은 그림자가 아니라 천연색의 그림자입니다. 내 옷이 무늬를 이루었습니다. 영화 같은 일입니다. 나는 오늘 밤에 천연색의 꿈을 꿀까?


내 그림자와 꿈을 총천연색으로 바뀔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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