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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59. 아버지 기일에 20220831

by 지금은

점심을 먹고 나서 차를 한 잔 마시는 동안 달력을 무심코 쳐다보았습니다. 붉은 숫자 네 개가 연이어 있습니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네.’


그렇습니다. 추석을 염두에 두었기에 사촌 동생에게 전화했습니다. 선산의 조상님 벌초 때문입니다. 해마다 추석을 앞두고 우리 형제들은 벌초합니다. 올해는 지난 일요일 벌초를 끝냈습니다. 아버지의 기일은 벌초하는 날을 기준으로 해마다 간격이 다릅니다. 어느 해인가는 벌초하는 날이 아버지의 기일이었던 때도 있습니다. 일을 끝내고 형님 댁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아버지의 기일입니다. 늘 추석 열흘 전입니다. 하마터면 아버지의 기일을 잊을 게 뻔했습니다. 까먹을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몇 해 전 형님이 병으로 쓰러진 후부터는 아버지의 제사가 생략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어머니와 조부모의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가 잘되지 않지만, 우환이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형수가 말했습니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믿기로 했습니다. 이후로 내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알람을 지웠습니다.


나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대신 날짜를 확인하고 우리가 늘 조상님을 모시던 그 시간에 고향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로 대신합니다.


‘달력을 보지 않았더라면 잊을 뻔했네.’


두 손을 모으고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유아기일 때부터 아버지는 병환으로 늘 누워 지냈습니다. 사랑방에 있는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마음씨가 좋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정이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뵐 수 있는 때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사랑방을 통해 드나드는 골방 안의 물건을 꺼내오거나 가져다 놓는 등 잔심부름을 할 때뿐이었습니다.


굳이 추억거리를 떠올리라면 아버지의 병환이 좀 나아졌을 때의 일입니다. 마차를 끌고 산기슭에 쌓아둔 나뭇짐을 실으러 갈 때 따라가던 일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나 나나 집에 올 때까지 서로 말이 없습니다. 모내기할 때 논에 따라갔더니 덥다며 사카린을 사서 물에 타 먹으라고 돈을 주었습니다. 어린 나는 느티나무 밑에 있는 가게로 쪼르르 달려갔습니다. 종이에 싸인 사카린을 손에 쥐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물에 타 먹으라는 말에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종이를 펼쳐서 손가락으로 알갱이를 찍어 입에 넣었습니다. 너무 달다 보니 쓴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지.’


물을 담을 그릇이 없습니다. 집으로 가기에는 내 발걸음으로는 너무 멉니다. 망설이다가 위에 논에서 아래 논으로 이어지는 물고에 이르렀습니다. 손바닥에 사카린을 모으고 흐르는 물을 재빨리 받았습니다. 순간 물이 오목한 손바닥을 넘쳐흘렀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조절이 잘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재빨리 입으로 가져갔지만, 단물은 이미 내 손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맹물입니다.


“다 먹었니.”


“응.”


“그 많은걸.”


아버지의 물음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의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 식구들이 모두 사랑방에 모였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자기로 했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나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밤이 깊어져 가자, 나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윗목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릅니다. 실눈을 떴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텅 빈 방 안에는 등잔불만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을 비비며 안방으로 향했습니다. 곡소리가 들렸습니다. 안방에는 누워있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식구들이 모여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구경꾼처럼 동정을 살폈습니다. 어리다는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슬프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사랑방 문을 열 때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청을 사랑방 윗목에 차렸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상식을 올렸습니다. 어쩌다 보니 평소에 상식을 올리는 일은 내 차지가 되었습니다. 형과 삼촌도 있지만 아마도 내가 하겠다고 나선 이유라고 짐작됩니다. 가끔은 무서웠습니다. 추분 이후의 짧은 해는 저녁이 되기 전에 사랑방을 어둠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긴 사랑방, 윗목은 문이 없다 보니 낮에도 밝지 못했습니다. 겨울은 더 어두웠습니다. 상식을 올리자마자 급히 절을 하고는 방문을 나오곤 했습니다.


무서움을 느끼면서도 식구들에게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면 삼촌이나 형이 대신하겠지만 왠지 죄를 짓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났습니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무서움에서 서서히 벗어났습니다. 식구, 친척, 친지들의 죽음을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은 결국 삶의 연속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윤회설을 믿는 것도 아니요, 부활을 꿈꾸는 것도 아니지만 삶과 죽음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탄생이 있고 소멸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죄송합니다. 평소와는 달리 고마움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벌초를 끝내고 조상님들께 인사를 올릴 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꾸벅꾸벅 절만 했습니다. 벌초가 버겁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집에 와서야 생각 없이 무릎만 꿇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합니다.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특히 우리 형제들을 위해 홀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몫까지 책임져야만 했던 어머니를 아껴주시고,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을 저승에서는 듬뿍 쏟으시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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