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들풀 하나가 20220830
나는 들꽃, 들풀을 좋아합니다.
유년기에는 시골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식물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저 유익함만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식용, 약용을 우선시하고 이외의 것은 그저 잡초로 여겼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마음은 나와 별반 다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런 내 생각이 바뀐 것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나는 사오 년 전부터 이전과는 달리 들풀에 대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습지의 갈대 사이로 삐쭉 올라온 꽃 한 줄기가 내 눈을 얼어붙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꽃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책을 찾아보고는 부처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년기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상형의 소녀 모습을 보았던 만큼이나 마음이 설렜습니다. 옆에는 똑같은 꽃이 다복하게 무리를 지어 뽐내고 있었지만, 힐끔 쳐다보고는 외면했습니다. 같은 꽃임에도 웬일일까? 전까지만 해도 꽃이라면 적어도 한 묶음의 꽃송이, 한 아름의 꽃다발은 되어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꽃송이들이 어우러져야 아름답다고 하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바뀐 이유는 세한도를 보고 난 후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세한도는 조선 후기에 화가인 추사 김정희가 그린 문인화입니다. 추사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이라고나 할까요, 그는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김정희에게는 이상적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 있는 스승에게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스승은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1844년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주었습니다. 김정희는 세한도 그림에서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가장 늦게 낙엽이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림의 연유는 그러하다 해도 나는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쓸쓸하고 추워지는 느낌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귀양살이의 쓸쓸한 삶이 묻어나는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우울한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 소나무가 서 있는 화면의 여백이 주는 넉넉함에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림은 여백이고, 글씨는 간격 놀음이야.”
서화 전시장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그의 동료에게 해주었던 말을 들었습니다. 무심코 한 그의 말이 내 머리에 각인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 무엇이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는지도 모릅니다. 이후 나는 글씨나 그림, 사진, 풍경을 볼 때면 여백과 간격을 첫 번째 순위에 두곤 합니다.
부처꽃을 한동안 바라보던 나는 근거리에 무더기로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의 줄기 하나를 잘랐습니다. 집에 돌아와 빈 와인병에 꽂아 식탁의 가장자리에 놓았습니다.
퇴근한 아들이 식탁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단출하지만 흰 벽과 어울려요.”
“너도 그렇게 보이니?”
“그런데 꽃 이름이 뭐예요.”
“흔한 꽃이라 알았는데 음, 식물도감에서 찾아보아야겠는데.”
답을 해주지 못했지만, 아들의 좋아하는 모습에 기분이 우쭐해졌습니다. 공통분모가 하나 더 늘었다는 생각에 나 또한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찮은 식물 줄기 하나가 집안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수강하는 글쓰기 시간입니다. 문우 한 분이 자신의 글을 소개했습니다. 글의 일부분을 인용합니다.
‘덩굴손 없는 나팔꽃/ 서로서로 의지하여 담벼락을 기어오르며/ 마지막까지 꽃 한 송이 피우려 애를 쓴다.’
강사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덩굴손이 없는 나팔꽃이 있다고요. 어떻게 나무를 타고 오를 수 있나요?”
“표현 그대로 제 줄기끼리 꼬아가며 올라갑니다.”
“그런 것도 있어요?”
“네.”
부정의 말을 꺼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입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기어오르는 식물은 모두가 덩굴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문우의 말을 대변해 줄까 하다가 강사가 무안해할까 봐 그만두었습니다. 사석에서 조용히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기어오르는 식물 중에는 덩굴손이 없는 식물은 으름, 댕댕이덩굴, 오미자, 칡, 등나무, 머루, 나팔꽃, 인동 등이 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산홍 줄기를 타고 오르는 마삭줄기 하나를 잘랐습니다. 이름 모를 꽃처럼 병에 담아 거실의 유리 벽에 기대어 놓았습니다. 긴 갈대의 줄기도 하나 꽂았습니다. 영산홍을 대신해 의지하라는 생각입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줄기에서 흰 뿌리가 내려 투명한 병 안을 수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줄기는 갈대의 줄기와 친해지려는 마음이 없는지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줄기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실로 줄기와 줄기를 묶어주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줄기의 끝은 막대기를 기준으로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덩굴손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문우의 글에 제 줄기끼리 꼬며 벽을 오른다는 나팔꽃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맴도는 줄기를 제 몸에 한 바퀴 꼬아 주었습니다. 밑줄기의 제 몸을 의지해서 오르기를 기대합니다.
요즈음은 들풀 한 줄기가 가녀린 몸으로 내 마음을 흔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