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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61. 가을, 한 줄기 꽃으로 풍성해지다 20220903

by 지금은

수국 한 송이를 꺾었습니다. 손에 들고 말라버린 흙을 조심스레 털었습니다. 장마 끝이라 땅바닥에 가지를 늘어뜨린 가녀린 꽃이 흙을 뒤집어쓴 채 널브러져 있습니다. 비바람이 수국을 마구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무거운 꽃들이 이리저리 내둘려 여인의 긴 머리칼처럼 마구 흩어져 있습니다.


나는 꽃을 집으로 가져와 수반에 올렸습니다. 흰 그릇에 흰 꽃, 자연스레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강아지풀의 색깔마저 옅은 색이니 소복을 한 여인이 흰 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무미해 보이는데, 뭔가…….”


나는 다육식물의 빈 작은 화분을 가져다 수반 위에 얹었습니다. 수국의 줄기 일부가 화분 속에 숨었습니다. 입체감이 있어 조금은 나아 보였지만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을 들어 방안을 이리저리 살폈습니다. 한쪽 모서리에 빨간 꽃송이 하나가 눈에 뜨입니다. 오월 어버이날에 복지관 직원분이 내 가슴에 달아준 카네이션입니다. 아직도 그때 그대로 선명한 색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꽃을 화분 가장자리에 핀으로 고정했습니다. 순간 느낌이 확 살아났습니다. 비록 빨간 조화이지만 수국과 어울려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합니다.


“맞아요. 어울려요.”


오랜만에 아내의 눈과 내 눈이 일치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제아무리 꽃꽂이를 잘한다 해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꽂이는 자연 상태의 꽃 그대로입니다. 장소와 관계없이 날씨와 관계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꽃의 모습은 피어나서 질 때까지 아름답습니다. 인위적으로 꽃꽂이를 하고 멋이 있느니 없느니 입에 올리는 것은, 평을 하는 그들만의 생각입니다. 나무를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분재를 만들고 멋지다고 말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정상이 아닌 것을 정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작된 것을 더 선호하기도 합니다. 분재를 보고 제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해도 산에 있는 나무의 자연스러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꽃꽂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산천에 자연스레 피어난 꽃과 견줄 수 없습니다.


나는 요즈음 들꽃에 관심이 갑니다. 한 줄기의 풀이, 한 송이의 꽃이 밍밍한 실내의 분위기를 살린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벌초를 하는 길옆을 지나다 잘린 식물 덩굴을 무심코 들고 와 빈 병에 꽂았습니다. 마삭줄기의 끝부분은 병 속에 흰 뿌리를 내리고 병 밖의 줄기는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위로 향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제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막대를 꽂아주자, 제 몸을 엮어가며 위로 오르더니 창문을 넘으려 합니다.


내 나이 쉰이 되었을 무렵입니다. 여름방학을 끝내고 학교에 갔더니 옆 반 교실 창가에 심어놓은 수세미가 창문을 온통 뒤덮었습니다. 이층 교실 긴 화분에 심겨있는 수세미가 천정에 매어놓은 끈을 타고 올라가며 여기저기로 가지를 뻗었기 때문입니다. 노란 꽃들이 옹기종기 창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누군가 화폭에 담은 듯 그림이 연상됩니다. 햇빛에 물든 창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지금 우리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열매 하나를 달고 있는 줄기입니다. 어떻게 밖으로 나갈 생각을 했을까. 줄기 하나가 용하게도 뻥 뚫린 연통 구멍을 찾아 밖으로 탈출하여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밖에서 이 광경을 본 선생님과 아이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나는 올봄부터 야생화에 관심이 갑니다. 사진 찍어 감상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민들레, 별꽃, 벚꽃, 앵두, 재밀화, 영산홍……. 우리 집 주변의 공원에는 봄꽃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습니다. 종류도 많습니다. 나무와 꽃의 종류가 많다 보니 그 이름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도 알 수 없어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비록 빈 병에 꽂아놓은 딱 한 송이의 꽃과 줄기가 남 보기에는 하찮아 보일지는 몰라도 내 머리를 순화시키고 가슴을 따스하게 합니다. 물을 갈아주는 동안 말을 걸기도 하고 잎을 매만지기도 합니다. 가끔 종이에 스케치하고 색연필로 색을 담아보기도 합니다.


나는 꽃꽂이를 배운 일은 없습니다. 다만 꽃꽂이를 해본 경험이라고는 초등학교 때뿐입니다. 학급 당번일 경우 들꽃을 꺾어 선생님 책상의 시든 꽃을 새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꽃꽂이에 대해 지식이 없으니 한 움큼의 탐스러운 꽃이 우리를 지켜본다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지식이란 꼭 누군가에게서 배워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행착오를 거치기는 해도 스스로 습득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긴가민가하는 가운데 머리가 조금 복잡해지기도 하고 시간이 길어질 뿐입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터득할 방법이란 실제로 해보는 것이 제일입니다.

나는 거실에 화병을 딱 하나만 놓아두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를 어쩐담, 욕심이 생겼나 봅니다. 식탁 위 등잔의 심지는 불꽃 대신 강아지풀이 고개를 들었고, 텔레비전 거치대에는 수반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는 풍성함보다는 단출한 것을 좋아했지만 이 가을에는 여백보다 꽃이 좋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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