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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63. 어제 무슨 일이. 20220907

by 지금은

태풍이 막 물러간 푸른 가을 하늘은 잠자리의 날개처럼 얇습니다. 연못가에서 하늘과 물을 번갈아 보던 나는 아내에게 전화했습니다.


“여보 청량산 갑시다. 하늘도 물도 신선해 보이네.”


“잠깐만요, 끝이 나지 않았는데 낙관만 쓰면 돼요.”


이십여 분이 지나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가까운 길로 곧장 가지 말고 돌아서 갑시다.”


앞에 보이는 지름길은 많은 차로 인해 늘 시끄럽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외면하고 전철역으로 향했습니다. 한 정거장만 가면 산으로 접어드는 길이 나옵니다.


오늘은 늦잠을 잤습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치며 창문을 두드리기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콩 타작하는 소리가 유리 벽면을 울렸습니다. 모든 것을 날려버릴 바람 소리에 현관문이 부르르 떨면서 첼로의 음을 토해 내기도 했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힌남노’라는 태풍이 우리나라 제주도를 지나 남해안을 두드리고 동해로 빠져나갔습니다. 정부에서는 며칠 전부터 모든 국민이 풍수해 방지를 위해 사전 점검하기를 당부했습니다. 기상 예보에 의하면 태풍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걱정되어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촌들의 상황도 궁금했습니다. 몇 년 전 장마로 인해 하마터면 집이 무너질 뻔한 일이 있습니다.


‘괜찮은 거야.’


생각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전화하고 싶었지만 늦은 밤이라 그럴 수도 없습니다.


전철역에 내리자마자 생각난 김에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상황을 알아보기도 전에 안심이 됩니다. 가까운 길을 모르는 체하고 다른 방향을 택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산에 오르면 점심시간이 될 게 분명합니다. 아내가 차려놓은 아침도 걸렀으니 배가 고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산에 오르기 전 점심을 먹어야겠습니다. 주변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비는 많이 왔지만, 낮은 지대는 바람이 심술을 덜 부린 탓인지 떨어진 나뭇잎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긴 풀줄기가 쓰러진 것 외에는 별다른 상처도 없는 듯했습니다.

산기슭의 음식점에서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허기가 입맛을 돋웁니다. 맛이 답니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보드라운 햇살과 맑은 바람을 손으로 만져봅니다. 어느새 가을 정취가 묻어납니다.


“안녕하세요.”


한 남성이 발걸음을 빨리하여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전에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입니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나를 용케 알아보았습니다. 몸짓을 보고 알아차렸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코로나를 잊은 채 두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산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질척합니다. 골이 팬 산길은 물골을 이루었습니다. 며칠 동안 내린 비는 사람들이 잘 다져놓은 흙바닥을 제 길로 알았나 봅니다. 아직도 군데군데 물기가 남아있고 작은 도랑을 이룬 곳도 있습니다. 정상 가까이 이르렀을 때입니다. 큰 소나무 하나가 산비탈에 머리를 거꾸로 처박은 채 굵은 뿌리를 드러냈습니다. 나무가 물길이라도 되는 양 빗물이 줄기를 따라 흐릅니다. 중간의 옹이는 수도꼭지가 되어 물을 낙하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제 부모보다 앞서 올라오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가리켰습니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이 아이의 부모도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자리에 머물러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물은 표면이 거친 바위에서 제 몸을 부딪치고 방울방울 튀어 올랐습니다. 장난감 물레방아를 돌려도 되겠습니다.


어릴 때의 장마철이 생각납니다. 나와 친구들은 장마철이면 어른들의 꾸중을 들어가면서도 물놀이가 재미있었습니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한 벌밖에 없는 옷이 젖으면 무엇을 입으려고…….”


꾸중을 들어도 물놀이가 더 좋은 걸 어찌하겠습니까. 눈치를 보아가며 몰래몰래 식구들의 눈을 피해 소나기가 내리는 속을 거침없이 나돌았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우리는 호박 줄기를 이어 붙였습니다. 대롱은 자연스레 물길을 만드는 호스가 됩니다. 책받침을 잘라 만든 바람개비 풍차를 호스 아래 세웠습니다. 바람보다 좋습니다. 바람의 세기는 변하지만, 물의 힘은 일정했습니다. 비만 계속 내려준다면 내가 내일 아침 찾아올 때까지도 물레방아는 꾀를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맨발에 팬티바람으로 넓은 마당을 달리는 재미도 있습니다. 온몸을 때리는 빗줄기 사이를 뚫고 친구들과 이어달리기합니다.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염려 없습니다. 토란잎이나 연잎을 머리에 얹고 학교에 가던 일도 생각납니다. 우산이 귀하던 시절 비를 피하고 싶었지만, 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동네 어귀를 나서는 순간 비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젖은 몸이야 어쩔 수 없고 책보자기가 걱정됩니다. 토란잎으로 보자기를 감쌌습니다. 교실에서 풀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빗물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책이라고 보아주지는 않습니다. 겉면이 젖어 짙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옆 친구의 책은 말짱했습니다. 도롱이를 쓰고 온 그는 옷이 젖었지만, 책보자기는 말짱합니다. 도롱이 속에 몸을 감춘 채 병아리를 품은 어미 닭처럼 가슴에 꼭 안았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 올랐습니다. 신발을 벗어 묻은 흙을 바위에 털었습니다. 젖은 운동화에 붙은 흙이 마음같이 달아나 버릴 리 없습니다.


‘목 장화를 신고 올 걸 그랬다.’


하늘과 연못이 나를 보고 해맑은 웃음을 지었으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정상의 흙바닥에 심어놓은 꽃들이 쓰러지고 꺾인 채 흙물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 예쁜 것들이 한순간에……. 꽃 몇 포기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스마트폰 속의 라디오에서 재난방송이 들려왔습니다. 재난지역의 인명과 재산 피해 속보입니다. 이번 태풍의 위력은 루사, 매미에 이어 세 번째라고 합니다. 비바람에 산사태를 비롯하여 가로수가 뽑혔습니다. 포항제철이 수해로 인해 처음으로 가동을 멈추었습니다. 전기와 다리가 끊기고 집이 무너지고 한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겼습니다. 해병대원들이 수륙양용차를 이용하여 인명을 구조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내 하늘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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