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한가위 소원 20220911
추석이 다가오자 여기저기서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냅니다.
‘한가위를 맞아 소망하는 일 잘 거두시고 즐거운 추석 명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과 함께 가쁨이 넘치는 추석 연휴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받은 같은 내용의 인사입니다. 세 사람의 인사말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이곳저곳을 떠돈 게 분명합니다. 나에게 마음을 전해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고맙기는 하지만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문구가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나는 문맥이 다소 서툴기는 해도 진심 어린 인사말을 좋아합니다. 남의 것을 베꼈다고 해서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느 때는 흔한 글귀를 읽는 순간 반가움이 반감됩니다. 나라고 해서 인사말이 개성적이고 톡 뛰어났을까. 아닙니다.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아 보이는 남의 글귀를 찾아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이게 아니었는데 하는 마음이 든 것은 친구가 한 말을 듣고 나고부터입니다.
“내가 보낸 글귀가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왔네.”
얼굴이 잠시 화끈했습니다.
이번 추석에 전한 내 추석 인사말은 평범합니다. 남이 잘 쓰지 않을 문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달구경 잘하고 늘 건강하세요.’
오늘 밤은 전국에서 밝은 달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백 년 만에 가장 둥근 보름달입니다. 뉴스 시간에 아나운서가 한 말입니다. 나는 달을 좋아합니다. 유년기 고향의 산들에 둘러싸여 미소 짓던 해맑은 달, 도시에서 살 때 전깃줄에 잠시 매달려 나와 눈 맞춤을 하던 달, 섬 생활을 할 때 밤새 큰 창문을 들여다보던 달, 어려서부터 수없이 보아온 달이지만 언제 보아도 늘 친근한 마음입니다. 달도 낯가림하는가 봅니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오자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얼굴을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낮에 이곳저곳 할 일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피곤했나 봅니다.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했는데 잠시 침대에 눕는 순간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눈을 뜨는 순간 밖은 먼동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꼭 달구경을 해야지 다시 다짐했습니다. 낮에 밖에서 하늘 구경을 했습니다. 파란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구름이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이곳을 봐도 저곳을 봐도 색다른 그림입니다. 휴대전화를 꺼내 틈틈이 파노라마 기능을 살려 사진을 찍었습니다. 지금 설렘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만큼이나 달구경도 멋지리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자 슬그머니 말을 꺼냈습니다.
“나 달구경 가요.”
아들과 아내가 따라나섰습니다.
우리 집에서 달구경 하기로 좋은 곳은 옥상입니다. 근방에서 우리 아파트만큼 높은 건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겨있는 옥상은 마음대로 오를 수 없습니다. 집 앞길 건너 공원으로 갔습니다. 평평한 공원 한 귀퉁이에는 동산이라고 부르기는 어색하고 둔덕이라고 말하기에는 높습니다. 이십여 미터 정도의 언덕이 있습니다. 멀리 갈 수 없다면 주위를 조망하기에는 이곳이 제격입니다.
아파트 건물 사이를 빠져나가자, 하늘에 밝은 빛이 다가왔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내미는 얼굴은 생각만큼 밝지 않습니다. 어제 아나운서의 말을 생각하며 기대했는데 수명을 다해가는 흐린 형광등의 빛처럼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아닐 거라고 하는 마음으로 눈을 비볐습니다. 달라진 게 없습니다.
‘어제 만났어야 했는데…….’
언덕에 올라 하늘을 향해 눈을 고정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보다 앞서 와 있습니다. 그들도 소원을 빌게 있는가 봅니다. 나도 있는데 이분들이라도 없겠는가. 밝은 얼굴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보지 못한 달을 만나야겠다고 아침부터 다짐했지만, 생각으로 끝났습니다.
‘우리 식구 늘 건강하고, 올해는 아들이 꼭 결혼하면 좋겠습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특별한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수줍음을 지닌 달이 엷은 구름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숨바꼭질을 합니다.
‘숨바꼭질하는 게 지루해서도 삼십 분만 지나면 면사포를 벗어내겠지.’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지루하다는 듯 말을 꺼냈습니다. 그만 가는 게 좋겠답니다. 달 주위를 흘러가는 구름을 계산해 봅니다. 파란 하늘이 드러나려면 새벽 두 시쯤이면 될까? 먼저 가라고 말하곤 아내와 딸이 비탈길로 발을 옮기자 슬그머니 일어섰습니다. 새벽까지 기다리기에는 지루한 시간이 될 게 분명합니다. 달을 보며 재빨리 말했습니다.
‘올해는 아들 결혼하고 우리 식구 모두 건강하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썰매를 타듯 잔디 깔린 비탈길을 주르륵 미끄러지며 내려갔습니다.
내일 다시 소원을 빌어볼까. 휴대전화를 켰습니다. 내일의 날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