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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68. 취향 20220927

by 지금은

횡재를 만났습니다. 여기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가래 열매입니다.


오늘은 글쓰기 야외 학습을 하는 날입니다. 강사를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하여 나무 밑을 서성거렸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고 등나무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이 무료했습니다. 동료들은 벤치를 지키거나 말거나 가방을 놓아둔 채 숲 속의 나무들을 살핍니다. 위를 올려다보고 발끝을 내려다보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밤나무 아래 있습니다. 빈 밤송이들이 너절하게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자연스레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정황으로 보아 누군가 억지로 털어냈음이 분명합니다. 몇 발짝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풀 더미 사이에 숨어있는 알밤을 다섯 개 주웠습니다. 나이가 제일 많은 동료에게 밤을 넘겼습니다.


“이 귀한 밤을…….”


늘 옛날 새색시처럼 얌전하고 말이 없는 분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별거 아니고 지금 몇 개 주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나무 밑을 살피는데 뜻하지 않은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말라빠진 가래 열매가 뾰쪽한 끝을 하늘에 세우고 탑처럼 서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갖고 싶었습니다. 어려서 갖고 놀던 추억 때문입니다.


‘밤나무 밑에 가래가 있다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밤나무 곁에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뭇가지를 올려다보고 바닥도 살폈습니다. 가래 열매 하나를 본 것 외에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가래나무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잎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강사가 허겁지겁 도착하여 늦은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안양까지 갔다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수업하는 동안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유튜브에서 가래나무의 생김새를 찾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선생님은 긍정적이군요.”


강사는 자기의 말에 내가 동감을 하는 줄로 착각했나 봅니다. 강의를 잠시 흘려듣고 있었습니다. 침묵을 지키자, 자신의 이야기를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는 잠깐이지만 강사가 무엇을 말했는지 모릅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 간식을 나눠 먹고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나는 슬며시 눈여겨본 나무 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틀림없이 가래나무입니다. 모습을 한 번 올려다보고 밑을 살폈습니다. 두 곳에 열매가 소복이 모여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열매를 모아 논 듯 보입니다. 하지만 어려서 보아온 열매의 모습은 없고 검은 껍질을 쓴 알맹이들입니다. 발로 비비자, 제 모습을 보입니다. 손으로 검은 껍질을 벗겨냈습니다. 손에 숯검정을 만진 것처럼 검게 묻었습니다. 그늘진 풀숲에 떨어져 있다 보니 습기를 먹은 상태로 속이 문드러졌기 때문입니다. 힘을 주지 않아도 호두알처럼 알맹이가 드러납니다. 겉껍질을 벗겼어도 외양은 검은색을 띠고 있습니다. 주글주글 홈이 많은 열매는 상한 껍질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헤어졌습니다. 나는 공원에 왔으니 함께 한 바퀴 돌아보고 갔으면 했는데 모두 역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나와는 달리 그들은 공원 가까이 살고 있어서 자주 들린다고 했습니다. 혼자 떨어졌습니다. 멀어서 자주 오지 못하니 산책할 겸 수목원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말동무가 없기는 해도 혼자 걷는 것은 함께 할 경우보다 덜 피곤합니다. 내 능력에 맞게 보폭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아차,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릅니다. 월요일은 대부분 휴장이나 휴관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수목원에 들러 나무의 이름을 더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랜만에 왔는데 입장을 못 하게 됐습니다.


요즈음은 밤나무나 도토리나무가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채취하려는 사람들이 나무를 훼손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현수막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동물을 위해 열매를 줍지 말라고 하지만 경고문을 앞에 두고도 열매를 줍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나무를 흔들거나 막대기를 가지를 후려칩니다. 억지로 열매를 떨어뜨립니다. 주위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못 본 척 지나갑니다. 대신 줍는 사람들은 힐끔힐끔 눈치를 봅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밤이나 도토리는 줍지 않습니다. 장난 삼아 몇 개 주워 잠시 만져보고는 되돌립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열매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그게 바로 가래 열매입니다. 내가 조금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사람은 이 열매의 나무를 잘 모릅니다. 알아도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너무 단단해서 깨뜨리기도 나쁘고 먹을 수 있는 알맹이도 지극히 적습니다.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으나 나를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열매 같지도 않은 검은 물체를 손에 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평소에 열매가 열리는 나무인지도 관심이 없을 듯합니다. 다른 동물들도 이 단단한 열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가져와 펼쳐보니 외양이 지저분합니다. 대야에 넣어 불린 다음 솔로 박박 문질러 여러 번 닦았습니다. 같은 일을 서너 차례 반복했습니다.


“지저분한 것을 가져와 뭘 하려고요.”


“가래로도.”


노리개로 좋고 지압에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어려서 장난감으로 갖고 놀기도 했습니다. 가래 호도란 말에 이해가 가는 모양입니다. 예전에 노인들이 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두 알을 손안에 넣고 굴렸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거요.”


다음 날 아침 열매 중 같은 크기의 짝을 찾았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당신 한 쌍, 나 한 쌍, 그리고 남는 것은 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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