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기분이 좋았는데 넘어졌다. 20221005
‘넘어졌다고요.’
넘어지는 순간 느낌을 알면서도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땅바닥에 부딪히고 나서도 잠시 버벅댔습니다. 일순간 발생한 일이지만 영화의 필름이 지나가는 것처럼 기억이 됩니다. 일어나서 몸을 살펴보니 왼팔에 피부가 군데군데 벗겨졌습니다.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생각과 달랐습니다. 넘어진 끝부분의 계단을 다시 올라가는데 왼 다리가 불편한 느낌이 듭니다. 계단에 모두 올라섰을 때는 왼팔이 아프고 쓰라립니다.
벤치에 앉아 다시 살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벗겨졌던 흰 살갗이 붉게 변했습니다. 피가 보입니다. 따가운 느낌도 듭니다. 정강이도 쓰립니다. 바지를 걷어 올리자, 무릎에는 오백 원짜리 동전 넓이로 핏자국이 선명합니다. 갑자기 파상풍이 떠오릅니다. 상처 부위를 깨끗이 닦아야겠다는 생각에 가까이 있는 수돗가로 향했습니다.
‘이게 뭐람.’
괜한 생각을 한 게 잘못입니다. 며칠 전에 이곳에서 능허대 축제를 했습니다. 축제가 끝났지만, 궁금한 생각에 찾은 게 잘못입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집으로 갔다면 탈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수돗가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고 상처를 흐르는 물에 닦았습니다. 쓰리고 따가운 살갗이 아픔을 더합니다. 어쩌겠습니까. 만약을 위해 참고 씻어내야 합니다. 부작용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평소에 비해 많이 걸었습니다. 타 지역 학습관에서 그림책 만들기 강좌가 있다기에 어렵게 신청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모집 첫날 신청을 했는데 뭔가 오류가 생겼습니다. 내일이 첫 수강인데 연락이 없습니다. 이상한 생각에 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만 명단에 없다며 다른 강좌에 신청한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밖에서 알아보기 어려워 집에 와서 확인했습니다. 내가 강의를 들으려고 신청한 강좌가 맞습니다.
다시 전화했습니다. 다시 알아본 결과는 같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내가 신청하는 가운데 오류가 있었나 봅니다. 어쩌겠습니까. 내 탓을 인정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수강 신청을 하고도 내일 못 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자리를 대신 채워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렵다고 하더니만 잠시 후 전화가 왔습니다. 마침 포기하는 사람이 있었는지는 나오라고 합니다. 배우고 싶었던 강좌이고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첫 시간입니다.
‘숨, 나에게 보내는 숨 터.’
강사의 강의 계획을 들어보니 어릴 때의 여러 가지 추억을 되살려 보는 활동입니다. 오늘은 놀이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림책도 함께 보며 환담했습니다. 여름밤 고향 집의 마당을 떠올렸습니다. 모깃불 피워놓고 반딧불이 넘나드는 담장 안마당에 누워 별을 세다 잠이 들곤 했던 추억입니다.
마지막에는 활동으로 제기를 만들어 놀이했습니다. 제기야 뭐, 어려서 많이 갖고 놀았으니 만만합니다.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그 시절의 그 방법대로 제기를 뚝딱 만들었습니다. 차보라기에 왼발로만, 오른발로만, 양발로도 번갈아 찼습니다. 옛 실력은 아니어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입니다. 강사를 비롯한 수강생들이 환호했습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보자기 제기차기도 했습니다. 월등한 차이로 우승했습니다. 상장이나 상품대신 박수를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인천대공원이 궁금했습니다. 오후 수업이지만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공원을 이리저리 거닐었습니다. 전에 갔을 때 가래호두를 여러 개 주웠는데 생각이 나서 수목원을 뒤졌습니다. 호두를 바닥에 갈아내어 예쁜 무늬를 만들고 싶습니다. 공원을 처음 조성할 때 가래나무를 본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공원의 다른 곳도 살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궁금증이 빚어낸 결과일까요. 아무튼 넘어졌습니다. 몇 년 전 눈길에 넘어진 후 처음입니다. 아내에게서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습니다.
“늘 궁금한 게 탈이야.”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는지 약을 가져와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었습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생각 외로 많이 걸었나 봅니다. 계획한 걸음 수보다 두 배가 넘었습니다. 다리가 풀려서 넘어진 게 아니냐는 아내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스스로 감깁니다. 약을 바른 후 폭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강의실에서 오늘의 기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는 요즈음 하루 종일 밝은 모습이었음을 상기하며 자신 있게 발표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될 것이라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인생사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더니만 오늘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넘어질 줄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산책자가 되어 맑은 공기 마시며 좋은 생각 하고, 원하던 강의 시간 잘 보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넘어지다니, 더구나 넘어지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도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릅니다. 아무튼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