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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77. 들꽃 한 송이 20221013

by 지금은

올 해는 들꽃에 손이 갑니다. 어제도 집으로 오는 길에 꽃줄기 하나를 꺾어왔습니다. 깨알처럼 다닥다닥 맺힌 꽃봉오리입니다. 꽃이 달팽이 기어가듯 서서히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작년 겨울 어느 날입니다. 갑자기 실내가 삭막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초 한 그루라도, 풀 한 포기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난 김에 베란다로 갔습니다. 화분을 둘러봅니다. 옮기려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화분이 너무 크거나 화초가 거실에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하나 살까.’


번잡스러운 생각에 그만두었습니다. 좁은 집안을 더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물을 먹으려고 주방을 보는 순간 빈 음료수병이 눈에 띕니다.


‘맞아, 저거야.’


저기에 무언가 꽂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손님은 회양목 한 가지입니다. 화단 가장자리에 남보다 삐쭉 솟은 가지를 하나 잘라 병에 꽂았습니다. 창가에 놓았습니다. 싱싱하고 앙증맞은 가지가 마치 촛불처럼 보입니다. 보름이 지나자, 병 하나가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의 친구는 사철나무 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겨울을 우리와 함께 지냈습니다. 한겨울에도 추위를 모른 채 나와 눈을 마주치며 밖을 내다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봄이 다가옴을 알아차렸나 봅니다. 새잎이 돋기 시작합니다. 연하고도 더 연한 연두색입니다. 날씨가 좋아지면 바깥세상으로 보내야겠습니다.


어느덧 민들레가 피었습니다. 비 오는 날 물방울 아니 빗방울이 연못을 수놓듯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에 눈을 빼앗겼습니다. 눈을 뜬 다음 날이면 여기저기 올망졸망 드러낸 민들레에 휴대전화를 가까이했습니다.


‘찰칵’


미쳤나 봅니다. 수백 번 아니 천 번도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민들레에서 다른 꽃들로 옮겨갔습니다.


한여름이 되었습니다. 한낮의 땡볕이 뜨겁습니다. 예초기에 의해 공원의 무성한 풀들이 잘려 나갑니다. 곁을 지나가다가 잘려 나간 마삭 줄기를 하나 가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창가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병에 꽂았습니다. 긴 철사도 하나 꽂았습니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줄기를 위로 향하도록 테이프로 살짝 감아주었습니다. 다음 날 보니 우듬지가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잡으려고 하나 봅니다. 하루 종일 관찰을 해보았습니다. 우듬지는 시계의 반대 방향으로 달팽이보다 더 느리게 원을 그립니다. 허공에서 하늘을 향해 방향을 바꿉니다. 한 바퀴를 도는데 하루가 걸립니다. 해바라기처럼 해를 따라 원을 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열흘이 넘어가자 흰 뿌리가 보입니다. 아내가 아침밥을 짓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가 창가의 병을 보았습니다.


“여보, 나와 봐요. 병 속에 웬 흰 벌레들이 있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벌레는 무슨 벌레, 뿌리가 내리고 있구먼.”


한 달이 지나자, 뿌리가 병 속을 채웠습니다. 흰 실타래가 엉킨 듯 무성합니다. 마삭 줄기는 가을이 오고 있음을 예감했을까요. 물을 자주 갈아주어도 잎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잎이 연노랑 빛을 띠더니만 한잎 두잎 떨어집니다. 마삭 줄기는 이렇게 우리에게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살려고 뿌리를 내렸는데 생명을 주고 싶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줄기의 일부분만 남기고 잘라 밖의 화단 한구석에 뿌리를 묻었습니다. 내년에 싱싱한 줄기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신 이 병에는 두메부추꽃 한 줄기가 이사를 왔습니다. 아내는 이 꽃이 마음에 들지 않나 봅니다.


“작아서 볼품이 없네, 색깔도 흐리고…….”


다음 날입니다. 나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이름 모를 들꽃 한 줄기를 가져와 꽂았습니다. 두메부추에 비해 가지가 조금 풍성합니다. 서로 마주 보는 꽃이 느림보처럼 천천히 오래 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요. 서서히, 서서히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그것도 한 번에 봉우리를 여는 것이 아니라 기차놀이 하듯 아래부터 차례차례 변화를 보입니다. 아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두메부추 은은한 게 괜찮네요.”


화려하지도 않고 작지만, 색깔이 점잖고 고귀한 모습입니다. 밤하늘의 불꽃놀이 중 동그란 불꽃이 사방으로 퍼지는 모양입니다. 올망졸망 무리 진 별꽃을 보는 느낌입니다. 나는 어느덧 밖에 나가지 않고도 가을을 즐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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