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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76. 생각나는 친구 20221012

by 지금은

오늘 평생학습관에서 그림책 읽기를 했는데 친구에 대해 떠오르는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보고 싶은 친구가 있나요?”


나는 ‘고개 너머 그 친구’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강사의 갑작스러운 말에 수강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그림을 못 그리는데 어떻게 하지.”


“걱정하지 마세요,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준비된 도화지를 드리겠습니다.”


도화지를 받고 보니 겉면에 검은색이 입혀진 종이입니다. 속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숨어있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짐작은 적중했습니다.


나는 중학교 때의 친구가 쉽사리 떠올랐습니다. 평소에도 문득문득 모습이 떠오르는 얼굴입니다. 그 이름은 ‘조화주’입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곧 친해졌습니다. 같은 반이고 집은 내가 사는 곳과 가까웠습니다. 학교를 걸어갈 경우 나는 우선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습니다. 아현동 고개입니다. 그는 고개가 끝나는 아래턱에 살고 있었습니다.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다소 먼 길이지만 우리는 차비를 아낀다는 마음에 걸어서 통학했습니다. 그나 나나 집안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시고 그는 어머니가 안 계십니다. 서로 처지가 비슷하다 보니 마음이 잘 통했습니다. 내가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그는 골목에서 나와 아래턱에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몇 달 동안 그의 집의 위치를 몰랐습니다. 사는 게 창피하다며 보여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침이면 매일 만리동 고개를 넘어 염천교를 지났습니다. 서울역광장의 시계탑 밑을 통과해 학교에 이르렀습니다. 이 년 동안 우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걸어서 통학했습니다.


삼 학년으로 올라갈 무렵입니다. 종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 학교 자퇴해야겠다. 집안 사정이 안 좋아 며칠 후 이사를 하기로 했어.”


내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는 이사하였습니다. 다음날 집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짐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통학길에 혼자가 되었습니다.


‘나쁜 놈, 의리도 없이…….’


나는 가장 친했던 친구와 이별한 채 졸업을 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졸업식이 끝나고 식구들과 점심을 먹으려고 교문을 나서는데 고등학생 교복을 입은 사람이 내 어깨를 툭 쳤습니다.


“조화주!”


그는 내게 축하의 말과 함께 꽃다발을 내밀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소식도 없이 말이야.”


어머니가 함께 식사하자는 말에 그는 빨리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연락처를 물었지만, 다음에 알려주겠다며 돌아섰습니다.


친구는 피아노 회사에 설립된 고등공민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이유는 단기 속성과정임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가장 노릇을 하면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주경야독의 길을 택했습니다. 내년에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다시 야간대학에 입학하겠다며 당찬 포부를 내비쳤습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대견스럽습니다.


연락하겠다던 그는 감감무소식입니다. 우리 식구들이 이듬해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친구가 내가 살던 집을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가끔 살던 집을 찾아가 확인했더라면 좋은 소식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의지할 수 있었던 사춘기의 시기이기에 더욱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가끔 꿈같은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백발이 되었을 그가 갑자기 튀어나와 ‘내 친구야’하고 손을 잡아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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