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구경일랑 먹고 나서 20201014
78. 구경일랑 먹고 나서 20201014
갑자기 팥죽을 먹고 싶습니다. 어제저녁부터입니다.
“팥죽 먹으러 가지 않을래요. 전에 먹고 싶다고 한 말이 기억나네.”
아내는 대답 대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옷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가 팥죽을 먹을 장소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남대문 시장입니다. 우리는 종종 서울 나들이를 합니다. 남대문 시장을 방문한 것은 여러 번입니다. 몇 차례 둘러보다 보니 이 골목 저 골목 안 간 곳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궁금한 마음에 시장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지만 점차 흥미를 잃어갑니다.
하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고는 해도 무심코 지나친 곳은 있게 마련입니다. 역에서 내렸을 때 화장실을 들러야 했는데 그만 잊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시장을 한 바퀴 돌려면 실례를 해야겠습니다. 화장실이라고 아는 곳은 높은 건물의 의류매장 한 곳뿐입니다. 건물에 들어서자, 아내는 일 층으로 나는 지하층으로 잠시 헤어졌습니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이라고 하더니만 이곳은 아예 남녀의 화장실이 층간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지하철을 비롯하여 요즈음의 건물에는 출입구가 하나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입구를 지나면 남녀의 화장실이 분리됩니다. 무심코 여자 남자가 눈이 마주치는 일이 없을 테니 어색한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볼까 했는데 아내가 막아섭니다. 집에서 늦게 출발하다 보니 이미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평소에 배고프다는 말이 없는 아내는 식사를 먼저 하겠다고 합니다. 전에 알아두었던 팥죽집으로 가려고 발길을 돌리다 앞에 보이는 간판에 눈이 갔습니다. 팥죽집입니다. 내가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여기서 먹으면 안 될까?”
우리는 가까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전에 보아두었던 곳보다 자리가 넓고 쾌적합니다.
몇 달 전입니다. 아내가 팥죽을 먹고 싶다기에 인사동에 들렀다가 시장을 구경할 겸 왔는데 문이 닫혀있어 허탕을 치고 다른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건물이 허름해 보이기는 하지 왠지 맛이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팥죽을 먹었습니다. 어릴 적 고향의 맛입니다. 전문 죽집에서 먹던 맛과는 달리 식감이 살아있습니다. 새알심이 차지고 밥알도 모양 그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맛있지, 시골집에서 먹던 맛이네.”
아내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입니다. 맛있습니다. 때가 되기도 했지만 다소 양이 적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물가가 올랐기 때문일까. 값은 그대로인데 그릇은 눈에 띄게 작습니다. 아내는 나의 식사량에 비해 적게 먹으면서도 식사 후 늘 배가 부르다고 합니다. 나는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늘 좀 더 먹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내 건강을 위해서는 참아야 합니다. 조금만 과식했다 싶으면 탈이 나고 맙니다. 의사의 말도 있습니다. 소식하는 습관을 지니라고 합니다. 나는 은근슬쩍 떠보았습니다. 식사량이 많은 사람이라면 두 그릇은 먹어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반응이 없습니다. 자신은 배부르다며 더 먹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내 빈 그릇은 깨끗했습니다. 그냥 물에 헹구기만 해도 설거지를 끝낼 정도입니다.
나는 이왕 온 김에 시장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어디 갈 데가 없을까.”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늘을 보았습니다. 산기슭을 따라 남산 전망대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내가 슬며시 팔꿈치를 잡아끕니다. 십여 미터 앞에 호떡 수레가 보입니다. 수수 찹쌀 호떡입니다. 조금 전에 배가 부르다고 했으면서도 호떡에 마음이 가는 모양입니다. 이왕 왔으니 하나씩 먹자고 합니다. 전에 먹어본 일이 있었는데 기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팥죽을 먹지 못했을 때처럼 이곳에 왔다가 허탕을 친 일이 있습니다. 수레가 보이지 않아 이곳저곳을 찾았지만, 헛수고했습니다. 몇몇 다른 곳에도 있지만 맛이 그 맛이 아닐 것 같아 먹기를 포기한 경우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장소입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여자분이 아니네.’
호떡을 만들어 파는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입니다. 글씨체는 달라도 호떡의 이름은 같습니다.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이때 한 떼의 사람들이 다가와 줄을 섰습니다. 예닐곱 명쯤 됩니다. 눈치를 살핍니다. 맛을 본 두 사람이 환한 웃음과 함께 맛있다고 말합니다. 주인도 미소를 지으며 한 조각 잘라 입으로 가져갑니다. 슬그머니 줄 뒤에 섰습니다. 호떡을 입에 문 사람을 보는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갑니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컵에 든 호떡을 손에 쥐고 먹을 장소를 둘러보자, 뒤쪽을 가리킵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그늘막이 있습니다. ‘후’ 컵 안에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더운 열기가 입 주위를 스치고 코를 타고 오릅니다. 한입 베어 물었습니다.
‘바로, 이 맛이야.’
수수 본연의 맛이 입안에 돕니다. 호떡은 단 게 흠이라면 흠인데 달지도 않습니다. 입안을 델 수 있다는 생각에 천천히 조각을 떼어 물었습니다. 와인이나 포도주를 음미하듯 시간을 둡니다. 전에 이 자리를 지켰던 수레 주인의 손맛보다 좋습니다. 생각의 시간 때문일까, 아니면 뜨거운 열기 때문일까 봐 컵을 비우기까지는 십여 분이 지났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집으로 가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내가 남산 타워를 눈으로 가리켰습니다. 아내의 눈이 전망대를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