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무늬 찍기 20221016
요즘 가래호도 만지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지압에 좋다기에 수시로 손 안에서 놉니다. 파인 골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손금보다도 많은 산과 골짜기가 모여 무늬를 이룹니다. 손에 힘을 주었다가 펴자, 가래 호도의 무늬가 붉게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일찍 잠에서 깼습니다. 먼동이 틉니다. 거실에서 몸을 움직이다가 책상 위의 가래호도 한 쌍을 집었습니다. 손에 쥐고 소리가 나도록 굴렸습니다. 거실이 마찰음에 휩싸입니다. 식구가 잠에서 깰 것 같은 느낌에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옆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가래호도를 집었습니다. 며칠 전 무늬를 만들기 위해 돌에 갈던 것입니다. 끝부분이 조금 갈렸습니다. 목질이 단단해서 잘 갈리지 않습니다. 무늬가 나오려면 좀 더 시간을 들여 갈아야 합니다.
몸을 움직일 겸 호도를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좋은 돌을 찾았습니다. 갈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놀이터 벽면의 대리석이 거칠어서 숫돌보다 더 효과가 있습니다. 호도를 벽에 대고 마찰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보름 전쯤 공원을 갔다가 산기슭에서 우연히 가래호도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밤나무가 있기에 밤알을 찾아보는데 눈에 띄었습니다.
‘밤나무 밑에 웬 호도가…….’
두리번거리다 나무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큰 밤나무 밑으로 그보다 작은 나무가 있습니다. 저게 ‘가래나무’ 직감적으로 머리를 스칩니다. 밤을 몇 개 줍는 사이 가래호도에도 눈독을 들였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밤나무 밑을 벗어나자 다른 나무가 보입니다. 가래를 떨어뜨린 나무와 같습니다. ‘와’ 생각지도 못했던 가래호도가 바닥에 소복합니다. 마치 누가 한 무더기 모아놓은 느낌이 듭니다. 횡재입니다. 몇 년을 두고 갖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가래호도의 추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향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은 무늬 찍기 공부를 하니 칼과 무나 당근을 하나씩 가져와.”
미술 시간 준비물입니다. 우리는 무를 잘라 칼로 무늬를 새기고 선생님이 마련한 색색의 물감에 묻혀 도화지에 찍었습니다. 미술 시간이면 대부분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는데 오늘은 색다른 표현에 나는 물론 친구들도 즐거워했습니다.
다음 날입니다. 친구 한 명이 가래호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도장이라며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었습니다. 생각해 보지 못한 무늬입니다. 이를 본 아이들이 부러워했습니다.
“이런 거 하나 주면 안 될까.”
친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귀한 거라며 외갓집에 갔다가 겨우 하나 얻었다고 합니다. 며칠 후 나에게도 가래호도가 생겼습니다. 하나밖에 없다던 친구가 몇 개를 가져와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늦게 안 내가 부탁했더니 정말 없다며 거절했는데 다음 날 귓속말을 하며 나에게 넘겼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가래호도를 돌바닥에 갈았습니다. 무늬가 나타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었습니다. 무슨 글자인지는 모르지만, 도장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한동안 나의 좋은 장난감이 되었습니다. 동생에게 내 도장이라며 무늬를 보여주었습니다.
“도장은 무슨 도장, 글씨도 아닌데…….”
“야, 도장 글씨는 원래 그런 거야. 글씨체가 이상해서 알아보기가 어려울 수도 있어.”
말도 안 되지만 호도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내 도장 역할을 했습니다.
나는 도장을 사용할 때면 가끔 어릴 적 생각이 떠오르곤 합니다. 가래호도의 무늬는 각기 다릅니다. 크기에 따라, 골의 모양에 따라 또는 얼마만큼 갈아내느냐에 따라 다양한 무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가래호도가 여러 개인만큼 무늬를 다양하게 만들 생각입니다. 가끔 화랑을 가다 보니 무늬만을 가지고도 작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무늬만으로도, 다양한 무늬의 조합을 이루었습니다. 그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흔히 보는 벽지나 옷감의 무늬와 연관 지을 수도 있습니다. 별거 아니네 하다가도 아이디어의 선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발견하거나 알아낸 것이 때로는 좋은 방향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이 알아차리기 전에 빨리 내 것으로 소화하는 방법도 어떤 의미에서는 곧 창조가 아닐까 합니다. 한동안 놀이터의 대리석 벽면이 내 친구가 될지도 모릅니다. 나만의 작품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