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내 자리 20221028
새벽에 밖으로 나가면 내가 앉는 자리가 있습니다. 아파트 주위를 산책하며 잠자리에서 굳었던 몸을 풀어냅니다. 기지개를 한껏 켜고 팔을 가볍게 휘돌립니다. 걷다가 목을 전후좌우로 움직이고 허리도 좌우로 돌립니다. 제자리 뛰기도 몇 번 해봅니다. 저 멀리 산 위로 햇살이 비치는가 싶으면 소나무 곁의 벤치에 자리를 잡습니다. 연못에 비치는 높다란 건물과 나무들의 자태를 기다립니다. 햇살을 마주한 그것들은 호수 깊이 거꾸로 박힌 채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냅니다. 때로는 일렁이는 물결에 나무와 건물들이 물속에서 춤을 춥니다. 이럴 때는 호수를 보며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감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에 떠올랐으니, 내일은 이 시간에 정말로 백조의 호수를 감상해야겠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오늘 새벽에는 누군가 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엄밀히 내 자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내가 앉던 자리입니다. 내 자리를 빼앗긴 기분이 듭니다. 이 벤치는 새벽을 빼고는 조용한 곳은 아닙니다. 옆에 커피숍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습니다. 처음 벤치에 앉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깥나들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뭔가 신발 속으로 들어가 발바닥을 신경 쓰이게 합니다. 때마침 벤치가 있기에 자리에 앉아 신발을 벗었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이 마음을 거슬리게 했습니다. 모래 몇 알이 보입니다. 신발을 엎어 바닥에 털었습니다. 발이 가뿐합니다. 마음이 가볍습니다.
오늘 저녁 소나무 밑은 아늑합니다. 아침햇살처럼 인천대교 너머로 지는 태양이 하늘을 물들입니다. 구름을 물들입니다. 저녁노을이 아파트 사이로 연못과 소나무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아침에 내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이 다가옵니다. 강아지의 목줄을 잡았습니다. 개를 따라오는 중입니다. 하필이면 그 개가 내 곁으로 다가올 게 뭡니까. 작고 귀엽지만, 반겨줄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수시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영역을 표시하는 그 모습이 싫습니다. 얼룩을 남기는 것도 그렇습니다. 개가 나에게 다가와 코끝을 들이댑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피할까 생각했지만 그만두고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습니다. 눈치를 챈 주인이 개의 목줄을 당겼습니다. 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자리는 아니지만 내 자리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누구나 앉을 수 있는 곳이기에 낯선 사람에게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 자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의 마음을 알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것에 익숙한 것은 내 만족의 결과일 뿐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셀 수 없이 앉다 보니 내 자리처럼 익숙해진 결과입니다.
며칠 전에 신포동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작년에 발을 디딘 이후 틈이 나면 자주 방문합니다. 낙후된 공간이 어느새 탈바꿈하여 걷기 좋은 모습을 보입니다. 신포역에서 시작하여 시장을 돌고 차이나타운을 거쳐 동화마을을 지나 자유공원으로 향합니다. 때로는 중간에서 개항장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합니다.
나는 차이나타운으로 접어들기 전에 무인카페를 들립니다. 이층 건물인데 아래층을 툭 털어냈습니다. 꾸밈이 없는 공간입니다. 천정이며 벽면의 골조가 드러난 채 손님을 맞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이라 사람들의 출입이 많지 않습니다. 값이 저렴하기도 하지만 조용한 곳이기에 마음이 듭니다. 테이블이 다섯 개가 있습니다. 나는 늘 갈 때마다 왼쪽의 햇볕이 잘 드는 자리를 차지합니다.
‘웬일입니까.’
이날은 몇 사람이 내 테이블을 차지했습니다. 커피를 뽑아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테이블 세 개가 비어있습니다. 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곧 떠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 생각과 달리 분위기로 보아 그들의 잡담은 쉬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빈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습니다. 내 자리를 빼앗긴 기분이 듭니다.
그들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들의 잡담이 이어지는 사이사이 곁눈질합니다. 몇 분이 지났습니다. 그들이 내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눈동자도 틈틈이 나를 주시합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잡지를 보는 척하며 외면했습니다.
“그만 가야지.”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내 자리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나의 마음을 가볍게 합니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자 재빨리 내 자리로 옮겼습니다. 의자의 온기가 나를 맞이했습니다. 너무 성급했나 봅니다. 커피잔이 저쪽 테이블에서 나를 쳐다봅니다. 그 모습이 낯설어 보입니다.
‘이리 와!’
컵에 낙서도 아닌 그림도 아닌 내 영역을 표시합니다. 여기 내 자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