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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110. 죽음에 대하여 20221117

by 지금은

나의 죽음은 어디까지 왔을까? 누군가 말했습니다. 자기 부모의 나이에 열을 더하면 대충 맞을 것 같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구십삼 세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그럼 백삼 세.”


표정이 밝습니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하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그럼 나는 이미 죽은 게야?’


나의 아버지는 병환으로 사십 살을 넘기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셨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칠십 중반이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셈입니다. 그의 말은 보편적 기준에 따른 것인지 모릅니다. 보편적 기준이란 게 어떤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너와 나의 수명이란 똑 부러지게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이런 기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요즈음 죽음에 관해 관심을 두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죽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죽음이 좋은 것일까. 어떻게 죽어야 아름다울까?’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강연회도 많이 열립니다. 죽기 전 죽음의 방법과 사후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과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유년 시절이나 젊을 때는 친척이나 친지의 죽음을 보며 나의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살 만큼 살았다는 안도감은 아니어도 그만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한 증거가 아닌가 합니다. 죽음과 삶은 하나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결국 삶이란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삶이 있으면 언젠가는 죽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거리상으로 보아 멀고 가까운 차이일 뿐입니다.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고 관련된 책을 읽었지만 죽음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흔히 듣는 말처럼 나는 죽은 자를 만나보지 못했고 더구나 그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잘 안다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나와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죽음에 대해 나보다 더 생각하고 많은 연구를 했기에 추측에 의존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죽음이지만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기에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입니다. 잠시 순서와 관계없이 살펴보았습니다. 무속 신앙에서부터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등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가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요약해 보면 말한다면 올바른 삶이 올바른 영생에 이름을 암시해 줍니다.


나는 신앙심이 부족하며 특정 종교에 얽매이는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죽음에 관해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지면상 더 자세한 그들의 세계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까.’


죽음은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잘 살고 잘 죽으라는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사는 고귀한 삶이 좋은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내가 좋은 죽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 나름의 보람 있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를 위해 계획된 생활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이 편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부담이 되거나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죽음에 임했을 때 죽음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내 생각을 미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요즘은 국가, 사회,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니 국가에서 시책이 제시되기도 하고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로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에 대해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힘입어 개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사전 의료 연명서, 죽었을 때의 절차 등입니다.


나는 이를 위해 살아생전에 하고 싶은 일과 사후의 일에 대해 버킷리스트를 작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큰 계획은 기간이 길고,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했으면 어떨까 합니다. 소소하게 느껴지는 것들, 즉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여행하고 싶은 곳, 운동, 흥미 등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버킷 리스트를 작성합니다. 나는 이번 달에 여자들 틈에 끼어 인형을 만들어 보고, 수도 놓아보았습니다. 청일점이며 그들과의 나이 차이도 큽니다. 어린이들 틈에 끼어 전래놀이도 했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홍대거리나 이태원 길, 서울의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인천의 중국인 거리를 거닐며 짬뽕도 한 그릇, 공갈빵도 맛보았습니다.


누군가 마지막에 남길 유언이나 묘비명을 말하기에 내 묘비명을 생각해 봤습니다. 마땅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아 갈팡질팡하다가 잠시 생각을 멈추었습니다. 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의 일상에 관해서는 아내에게 틈이 있을 때마다 말해둡니다. 아직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흔적 없는 흔적을 남길 생각입니다. 이 땅을 훼손하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굳이 묘비명까지 남겨야 할까 고민합니다.


‘뭐 미리부터 죽을 생각을 하느냐고요.’


하느님의 부름에는 내가 생각하는 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느님의 특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죽음이란 생각에 따라 심각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크기는 양으로 측정할 수가 없는 일이고 보면 크기를 달리하는 사람에게는 생각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만 생각하고 억지로라도 매듭을 지어야겠습니다.


‘죽음’


앞으로의 삶이 처음인 것처럼 죽음 또한 처음이니 미지의 세계임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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