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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115. 헬멧 20221120

by 지금은

‘헬멧’


헬멧이 달아나기 전에 재빨리 잡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사진을 찍는 중입니다. 생각난 것을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글쓰기의 소재가 떠올랐을 때 방심하다가는 그만 흘려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길을 걷다가, 차 안에서, 또는 잠자리에서……. 수없이 많습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또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다 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가물가물합니다.


이륜차 헬멧이 길바닥에 팽개쳐져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찰칵’


집어 들었습니다. 나뭇가지에 걸쳐놓기도 하고 낮은 보안등 위에 모자를 씌우듯 얹어놓고 셔터를 누릅니다. 갑자기 헬멧을 소재로 그림책을 구상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틀을 짤 여유도 없이 우선 실마리를 만들었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몇 장면을 화면에 담아놓으면 사진 검색을 할 때마다 잊지 않고 내 생각을 불러올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내가 헬멧을 이 나무 저 나뭇가지에 옮기며 사진을 찍자, 산책하던 부부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내 행동이 거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시선에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자리를 옮기며 셔터를 눌러대자, 그들도 내 주위를 떠났습니다.


재작년에는 민들레에 빠져 수없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천여 장 정도는 되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이십여 장의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이른 봄부터 초여름이 되기까지 공원을 누볐습니다. 그림책 만들기에 함께 참여한 수강생들은 그림을 그려 화면을 구성했는데 나만 사진으로 책장을 채웠습니다. 책의 내용이 모두 다르듯 화면도 모두 달랐지만, 그들의 책에 비해 내 것은 지면이 깔끔하고 깨끗했습니다. 전문가가 아니고 보면 그림이 다소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경우도 전문 사진사가 아니니 허점이 있겠으나 나의 초보적인 눈으로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한 사람들의 칭찬에 내 초보 실력이지만 만족했습니다.


보완점을 발견한 것은 그 후의 일입니다. 틈날 때마다 종종 책장을 들춰보니 이렇게 했으면 좀 더 좋은 화면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두 군데에서 자연미가 아닌 인공미가 전체적인 그림을 어색하게 했다고 느꼈습니다.


올해는 그림으로 도전했습니다. 서툰 솜씨이지만 우연히 알게 된 새내기 미술학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색감을 배합하고 칠하는 방법이 서툰 나는 그의 훈수로 인해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배워야 할 점이 많이만 만들어 놓고 보니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진일보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일이란 우선 저질러놓고 보아야 뭔가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나는 평소에도 하지 않고 후회하기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자전거나 킥보드 등 이륜차가 많아지면서 헬멧 또한 많아졌습니다. 나라에서는 이륜차의 경우 헬멧을 쓸 것을 홍보합니다. 전동기가 달린 경우에는 의무적으로 착용할 것을 공지하고 단속합니다. 하지만 법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가끔 보이고 빌려 타는 경우 킥보드에 있는 헬멧을 함부로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경우를 봅니다. 이럴 경우 나는 헬멧을 주워 길의 가장자리 턱에 올려놓거나 나뭇가지에 걸쳐놓습니다. 나에게는 하찮은 물건이지만 상대에게는 귀중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길을 지나다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 봅니다. 내가 한 것처럼 길의 가장자리나 나무의 가지에 걸쳐놓은 것을 가끔 보게 됩니다.


글의 소재가 떠올랐을 경우 나는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여의찮을 때가 있습니다. 종이가 없거나 펜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휴대전화에 간단히 메모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경우 입으로 몇 차례 중얼거립니다. 입력의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집에 도착했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아 실행에 옮길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글의 소재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하는 경우는 아니지만 나는 산책의 경우가 아니라면 가방을 메거나 작은 손가방을 들고 외출합니다. 그 속에는 펜과 메모지 그리고 책 한 권 정도는 들어있습니다.


나의 대중교통은 주로 전철을 이용합니다. 무료이고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이 아니면 목적지까지 앉아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독서를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보통 짧게는 삼사십 분 이상을 움직이니 그동안 넘기는 책장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좋은 점은 앞사람과 눈을 마주칠 일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경우 전철 안에서는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오늘은 어쩌다 보니 뒤 칸의 전철을 탔습니다. 자전거와 자전거 헬멧을 쓴 두 사람이 있습니다. 슬며시 뒷모습을 몇 장 찍었습니다. 그림책에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준비입니다.


‘헬멧, 헬멧’


나는 한동안 헬멧에 빠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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