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이렇게 고마울 수가 20221129
‘아니 벌써 비가 오는 거야.’
전철역을 벗어나는 동안 우산을 손에 든 사람들이 보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한 사람이 등을 진채 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좁은 통로를 옆걸음으로 비켜났습니다. 순간 손등에 비의 감촉이 느껴집니다. 잠시 엘리베이터의 외벽에 붙어 하늘을 주시했습니다. 금방 멈출 비는 아닙니다. 비를 피하기는 해야겠는데 옆 사람과 몸이 닿다 보니 불편한 생각이 듭니다. 재빨리 건너편 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긴 의자에 앉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도 건너왔습니다. 몸이 불편해 보입니다.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습니다. 그는 내 옆에서 몇 걸음 떨어져 앉았습니다.
아내의 말을 들을 걸 그랬습니다. 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어가기에는 무리입니다. 이 비라면 옷이 흠뻑 젖을 게 분명합니다. 전화할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우산을 가지고 마중 나오라고 했다가는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합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뭐야.’
할 일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중 길 건너 작은 나무들 사이로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길고 검은 물체입니다. 퍼뜩 우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좌우를 살피며 재빨리 길을 건넜습니다. 내 예측이 맞습니다. 잠시 기쁜 마음이 식었습니다. 살 하나가 꺾여있습니다. 머리 위로 올립니다. 족히 일 년을 넘긴 모습입니다. 퇴색된 검은 재색입니다. 새똥이 군데군데 무늬를 이루었습니다. 거미줄도 있습니다. 외양이 시원치 않아도 비를 가리기에 지장은 없습니다. 우산을 나뭇잎 위에 몇 번 문질렀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정류장에 앉아있는 사람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무릅니다. 내 발길도 잠시 멈췄습니다.
‘우산을 건넬까 말까.’
그대로 그의 앞을 지나쳤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주고 싶지만 헐어빠진 우산이라 오해를 살지도 모릅니다. 살이 부러진 새똥 우산,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집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으리라 상상합니다.
‘운이나 한번 떼볼걸’
내가 집에 도착한 시간을 맞추어 비는 공교롭게 멈췄습니다. 오늘은 눈이 효자 노릇을 했습니다.
늦은 밤부터 내일 사이에 비의 양이 많을 거라고 했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흐리던 하늘이 개는 듯싶습니다. 고층 아파트의 외벽이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덕분입니다. 밖으로 나갈 채비를 잊은 채 잠시 한눈을 팔았습니다. 노란색이 곱다는 생각도 들지만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줄기가 눈을 홀립니다.
‘빛줄기가 저 빛줄기가…….’
금방이라도 시 한 수가 눈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은 텅 빈 채 빛이 연출한 황홀감에 빠졌습니다.
“여보 뭐 해요. 공부하러 간다고 하더니만.”
나는 그제야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고 현관으로 갔습니다. 배웅하는 아내가 우산을 챙기라고 했지만 무시했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오후 늦게 비가 온다고 했으니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집 앞까지 쓰고 온 우산을 아파트 뒤 화단 나뭇가지에 기대어 놓았습니다. 살이 꺾이고 새똥이 묻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버리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내일은 도서관에 갈 때 가지고 가서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아야겠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옛날이야기를 자주 끄집어내는 것은 식상한 일이기는 해도 내가 어릴 때는 우산이 드물었습니다. 기름을 먹인 종이우산입니다. 다음으로 비닐우산이 나왔지만, 이 역시 흔하지 않아 지금처럼 쉽게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있다고 해도 약해서 비바람에 잘 찢어지고 뒤집혔습니다. 시골에서는 비가 오면 주로 도롱이를 등에 걸치고 고깔을 썼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우산이 흔해졌습니다. 크기가 다르고 색깔도 다양합니다. 비가 그치고 나면 종종 우산들이 길거리나 후미진 곳에 버려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 망가진 것들이지만 때로는 온전한 우산도 있습니다. 사용하고 나니 귀찮은 생각에 버렸을지 모릅니다. 내가 새똥 우산을 화단 가장자리에 놓고 돌아서는 순간 접는 우산이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손잡이의 단추를 눌렀습니다. 부드럽게 펼쳐집니다.
‘누가 쓸 만한 것을 버렸군.’
생각과는 달리 우산살 하나가 꺾였습니다. 손으로 자리를 잡아 봅니다. 꺾인 살을 제 위치에 고정해 봅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옛날처럼 우산을 전문적으로 고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산을 접어 새똥 우산 옆에 놓았습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우산을 고치는 기술을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일부터는 우산 삼 형제가 함께 모여 살아야 합니다. 학교 옆 울타리 근처에 지난해부터 멀쩡한 비닐우산 하나가 잠자고 있습니다. 이 우산들은 나를 비롯한 누군가가 잠을 깨울 때까지 역전의 한 곳에서 조용한 휴식을 취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