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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130. 이런 날에는 20221204

by 지금은

잿빛 구름이 드리웠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졸음이 살며시 밀려옵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어제보다 기온이 올라갔다고 하지만 밖을 보는 느낌은 다릅니다.


‘어제는 햇볕이 있었는데…….’


우물쭈물할 새가 없습니다. 잠시 눈꺼풀이 내려오면 낮잠에 빠질 게 분명합니다. 겉옷을 걸쳤습니다.


“어디 가시려고요.”


“바람이라도 쏘여야겠습니다.”


“음산해 보이는구먼.”


밖으로 나왔지만, 방에서의 생각보다 쌀쌀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까짓 날씨쯤이야 뭐 하는 마음으로 호숫가를 걷습니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입니다. 홀로 걷는 사람, 쌍쌍이 짝을 지어 걷는 사람, 한 무리의 재잘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멀리 배를 타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이런 날씨에 무슨 보트를 탈 마음이 생길까 하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내 짐작은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보온이 잘 되어있습니다. 투명 비닐 가림막으로 전체를 둘렀습니다. 안이 자세히 들여다보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혹시 전열기라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에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목덜미가 서늘합니다. 지퍼를 턱밑까지 올렸습니다. 이만한 날씨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손이 시려옵니다. 손등을 비볐습니다. 손깍지를 꼈습니다. 앞으로 여자아이가 다가옵니다. 나는 시린 손을 공수라도 하는 듯 배에 댄 채 옆을 지나쳤습니다. 덤벙거리며 걸어오던 그녀는 내 모습에 눈치가 보였는지 조심스레 비껴갑니다.


‘장갑을 끼고 나올걸.’


아내의 성화가 떠올랐습니다. 해마다 겨울철이면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그 많은 장갑은 뭐 하게요.”


나는 젊은 시절 장갑을 끼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귀찮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지금은 갑갑함보다는 추운 생각이 앞섭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몇 년 전부터 장갑을 챙기는 횟수가 늘었습니다. 걷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손이 주머니에 들어갔습니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내 생각도 생각이지만 이때쯤이면 노인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추운 날 외출 시에는 모자와 장갑은 필수라고 강조합니다. 생각이 나자, 잘못이라도 한양 주위를 둘러보며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손을 뺐습니다. 배 터를 지날 즈음 손이 아린 듯합니다. 옷소매를 늘려 손을 속으로 감추었습니다. 온기가 느껴집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이렇게 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나는 이십여 미터 갔을 무렵 소매 속에서 손을 뺐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떼 지어 나를 향해 걸어옵니다. 씩씩한 걸음걸이입니다. 배를 타러 오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지나가자, 손이 나도 모르게 주머니를 찾았습니다. 소매 속에 숨길 때보다는 온기가 덜하지만, 아린 기운이 사라집니다.


오후의 하늘은 점차 기온을 끌어내리려나 봅니다. 바짓가랑이가 허전함을 느낍니다. 내복을 두고도 입기 싫어하는 나는 오늘도 두꺼운 바지 하나만 입었습니다. 이런 날은 종아리를 가리는 토시를 할 걸 그랬습니다. 이빨이 떨리지는 않지만 춥습니다. 마스크에 김이 서렸나 봅니다. 답답함에 잠시 마스크를 벗었습니다. 한기가 입과 코 주위를 덮칩니다. 휴지로 얼굴과 마스크를 점찍듯 자근자근 눌렀습니다. 재빨리 마스크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참을만합니다. 아직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아닙니다.


나는 중국 북경의 추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십여 년 전 이월 초에 북경을 여행한 일이 있습니다. 처음 가는 외국 여행이라서 들뜬 마음에 준비를 소홀히 했습니다. 두꺼운 옷과 만약을 위해 여벌의 옷을 가지고 가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내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도 되는 양 잿빛 하늘은 내가 여행을 끝낼 때까지 심술을 부렸습니다. 춥다, 춥다 했지만 내가 우리나라에서 겪은 강추위는 견딜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추웠습니다. 옷 속을 파고드는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듭니다. 점차 강도가 느껴지고 뼈까지 시리고 저리는 고통이 몰려왔습니다. 종래는 몸의 감각이 무뎌짐을 느꼈습니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냉기를 느꼈습니다. 연기에 둘러싸인 착각 속의 잿빛 하늘 어디에선가 모르게 달려드는 추위, 북경의 겨울은 마음속에 아직도 그렇게 남아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중국의 다양하고 멋진 풍경을 눈여겨보면서도 곧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한번 데인 기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해가 거듭되다 보니 마음과는 달리 더위와 추위에 심신이 더 약해지나 봅니다. 자꾸만 옴츠러드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옷 광고를 하면 좀 더 두꺼운 옷, 좀 더 따뜻한 옷에 눈이 팔립니다. 내일은 꽤 추워질 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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