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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133. 먼저 매를 맞기로 했다 20221207

by 지금은

서로 눈치 싸움을 하는 것 같습니다. 과제물 제출 기일이 지났지만, 누구 하나 반응이 없습니다. 나도 주위 사람들의 기색을 살핍니다. 그동안의 분위기로 보아 다들 한가락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꿈틀대는 단어들을 짚어볼 때 나보다는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준비는 했는데 올려 참아.’


며칠을 궁리했지만, 조바심이 생깁니다. 빨리 제출하여 강사의 평을 듣고 싶습니다. 요리조리 재다가 새벽 일찍 잠이 깨자, 마음을 굳혔습니다. 매를 먼저 맞는 편이 낫습니다. 컴퓨터를 켰습니다. 상대의 메일을 확인하고 꾹 눌렀습니다. 원고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보낼 걸 하는 생각에 글을 펼쳤습니다. 이미 떠났으니 취소하기는 싫고 내용을 매의 눈으로 살핍니다. 진작부터 신경을 쓸 걸, 초고라는 생각에 참새의 눈으로 살폈습니다.

내 글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초고를 완성하고 덤벙덤벙 두세 번 확인합니다. 괜찮은 글이라는 자만에 빠집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봅니다. 몇 군데 오자나 탈자를 고칩니다. 때로는 문장을 수정하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 않느냐고 생각하며 끝냈습니다. 며칠 후 시간을 내어 쓴 글들을 다시 읽어봅니다. 허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알쏭달쏭하다 싶으면서도 단락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퇴고할 때마다 늘 수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강사나 다른 글쓴이의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초고는 쓰레기야.”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햇수가 거듭될수록 그들의 말이 진실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했을 무렵의 원고는 아직도 수정 중입니다. 열 번도 넘었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주변이 변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도 변화가 있나 봅니다. 가지를 달다가 어느 날 싹둑 잘랐습니다. 아니 나무를 통째 뽑아버렸습니다. 새 나무를 심었습니다.


‘이를 어쩌지.’


그냥 남겨둘 걸 그랬습니다. 허접스럽다고 날려버렸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휴지통을 찾았지만 이미 비워버렸습니다. 놓친 놈이 커 보인다는 말처럼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어쩌겠습니까. 소경이 지팡이를 짚으며 길을 찾아가듯 내용을 다시 더듬어 갑니다. 다행입니다. 뼈대가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살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있던 살 없는 살을 덕지덕지 붙이고 붙였습니다. 쓰러지지 않게 하려면 몇 날을 씨름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수업에 참여하면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공표하기로 했습니다.


“내 글을 혼내주십시오.”


전 시간에 강사가 말했습니다. 밴드를 만들어 각자의 글을 올리고 나서 서로 평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개중의 몇 사람은 평을 받고 상처받을까 염려되는 모양입니다.


“감정을 상하게 할 평이라도 달리면 그 상처가…….”


좋다고 했던 사람도 찔끔하는 눈치입니다. 하기야 요즘은 남을 모함하는 평이 판치는 세상이고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좋지 않은 평으로 트라우마(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등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사가 중재에 나섰습니다.


“우리는 멋진 글을 쓰고 싶어 모인 사람들이니 기분을 상하지 않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다가서면 되지 않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일부는 껄끄러운 표정입니다.


“내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나는 매 맞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많은 매를 맞아 이력이 났습니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은 아니지만 기분 좋은 평을 듣기도 하고 얼굴을 붉힌 일도 있습니다. 상대에게 뭐라 대놓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상처를 주는 평이라도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한 약이라고 여기면 견딜 만합니다. 때로는 고마운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너 때문에 모르는 것을 알게 됐어. 그 때문에 한층 도약했어.”


직장에서 한 여자 동료와 친하게 지냈던 일이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박학다식한 사람입니다. 달과 별이 있는 하늘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즐겼습니다. 독서광입니다.


“무식이 철철 넘쳐요.”


이 한마디가 나를 책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이 상처 한마디가 보약이 되었습니다.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이 여자 때문입니다. 비난이 나를 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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