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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Nov 13. 2024

2022 어느 날

140 비 오는 날에 20221111

변덕스러운 날씨에는 이에 못지않게 마음도 변덕스럽습니다. 아침 일기예보에 날씨가 불순하다기에 우산을 챙겼는데 밖으로 나서자 햇볕이 쨍하고 얼굴을 드러냅니다. 지붕 위로는 구름 몇 점이 있기는 해도 지금 같아선 온종일 햇살 등살에 그늘을 골라 발을 딛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발길을 돌려 우산을 소리 나지 않게 현관에 내려놓았습니다. 소방서 앞 횡단보도에 적색신호가 내 앞을 막아섰습니다. 소방서의 붉은 건물과 자동차를 보니 더운 생각이 더해졌는데 신호등까지 내 목덜미를 화끈거리게 합니다. 밤새 내린 비로 인해 횡단보도의 햇볕가리개는 몸을 도사린 채 몸을 펼칠 생각이 없습니다.


점차 햇볕이 기운을 더합니다. 기온도 높은데 습도까지 높으니 짜증스러운 날씨가 될게 분명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향을 달리할 걸 그랬나 봅니다. 햇볕이 잘 드는 공원길을 걷는 게 아니라 큰 건물의 실내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역까지의 거리는 조금 멀기는 하지만 이 길을 택하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건물과 건물을 통과하는 동안 더위는 잊을 수 있습니다. 냉방이 잘 된 덕택입니다.


역까지 가는 동안에 잠시 내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산을 그냥 가지고 왔더라면 양산대용으로 쓸 수 있지 않겠나. 막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 앞서가는 사람이 정말 우산으로 태양을 가렸습니다.


‘가방도 넉넉하고 만.’


잠시 후 노란 우산도 뒤를 따라갑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허공에 몇 차례 휘둘렀습니다. 모자 속에 있는 열기를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모자를 썼습니다.


역에 반쯤 도달했을 때입니다. '후드득'  간헐적으로 굵은 빗방울이 내 팔을 때립니다. 하늘을 올려보자 콧잔등도 때립니다. 발길을 재촉합니다. '뛸까 말까' 지나가는 비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천천히 몇 발짝을 옮겼지만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빗줄기가 많아졌습니다. 등이 젖는 느낌이 듭니다. 서둘러 발길을 재촉합니다. 휑하니 뚫린 공간이 펼쳐져 피할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역전에 이르기 전에 소나기 세례를 받겠다 싶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엉뚱한 생각을 때가 있습니다. 


'비 사이를 뚫고 달릴 수 있는 재주가 있다면 좋겠구먼'


잠시 숨을 헐떡이며 발길을 재촉할 때입니다. 길가의 구석진 곳에 하얀 비닐이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우산입니다. 무작정 집어 들었습니다. 버려진 우산입니다. 펼치니 부러진 살이 하나 보입니다. 약간의 균형을 잃었지만 비를 피하기에는 그런대로 쓸만합니다. 발걸음을 늦추어 가뿐 숨을 몰아냅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역전의 우산입니다. 비가 개이자 어느 날 버려진 것을 하나 주워 엘리베이터의 뒤편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장마철 비가 자주 내리니 역을 나서는 순간 요긴하게 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나는 한동안 평생학습관의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일이 있습니다. 문우들과 주마다 한 번씩 모여 쓴 글을 발표하고 선생님의 평을 듣습니다. 이 중에 내 우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역을 나왔는데 비가 내립니다. 비가 그치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는 동안 저만치 아파트 담장사이에 꽂혀있는 우산이 보입니다. 시간이 점점 지체되자 마음이 갑니다. 비가 잠시 잦아드는 틈을 타서 다가갔습니다. 펼쳐보니 겉면에 거미줄과 함께 새똥이 묻어있습니다. 색이 바래기는 했지만 속은 멀쩡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잘 사용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칠 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내용은 모르지만 부러운 눈초리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 뒷면에 감춘 우산이 바로 그것입니다.  


며칠 전에 낙엽과 함께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역에서 내리자 비가 그쳤지만 갑자기 우산 생각이 났습니다. 


'잘 있겠지.'


슬며시 뒤편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동안 마음을 멀리했기 때문일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벽의 무성한 풀더미 속에 놓아두었는데 무성하던 잡초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벌초를 하는 사람이 풀과 함께 낡은 우산이라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옛말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마철 비가 그치고 나면 가끔 길거리에 버려진 우산이 보입니다. 겉면만 보아도 대부분 망가진 우산입니다. 하지만 멀쩡한 우산도 있습니다. 경제적 삶이 풍요로워진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망가진 우산을 고쳐 쓰는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습니다. 예전에는 우산이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요즘은 비가 올 때뿐입니다. 


오늘은 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우산을 주제로 한 노래가 기억납니다.


‘가을비 우산 속에/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 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이런 날이면 덕수궁 돌담길이라도 걸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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