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눈앞에 봄빛이 완연합니다. 나는 지금 빛을 따라가는 중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겨울의 뒤꽁무니를 따라왔습니다. 삭풍과 어울리며 흰 눈과 친해지기도 했습니다. 공원을 걷다가 아이들이 재미에 빠져있는 눈오리에 잠깐 정신을 팔았습니다. 어릴 적 연이나 팽이, 눈썰매 등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이 나이에도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온통 땀으로 몸이 사라지는 눈오리에 마음이 정지되어 있었습니다. 저물녘 아이들이 돌아간 다음에야 나는 주인이 되어 반쯤 녹아내린 오리의 몸을 매만졌습니다.
‘금방 사라질 거라면 뭐 하러 나타났노.’
눈을 한 주먹 두 주먹 뭉쳐 사그라지는 오리 병아리의 몸을 다시 부풀립니다. 덩치 큰 노년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오리는 처음의 매끄럽던 몸매는 간데없고 깃털 빠진 모습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내일의 기온은 영하였으면 좋겠다.’
오리의 마음이 상할까 봐 눈을 ‘찡긋’ 미소를 보였습니다.
이제는 봄과 열심히 놀아야겠습니다. 놀다 보면 어느새 여름이 나를 맞이할 것입니다. 가을 또한 그러하겠지요. 나는 이별의 순간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어’하는 사이에 오늘이 가고 또 오늘이 갑니다. 어제를 챙길 사이도 없이, 내일을 맞이할 준비도 없이 오늘이 가고 오늘이 갑니다.
나는 책을 좋아합니다. 나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나는 미술을 좋아합니다. 나는 운동에는 관심이 다소 적은 편이지만 움직임만큼은 좋아합니다. 나는 산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들과 더 친합니다. 황순원, 알퐁스도테, 모짤트, 칸딘스키, 엄복동…….
자연 친화적이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하루해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나에게 주어진 하루는 짧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이것이 눈에 들어오고 저것이 손에 잡히고, 또 다른 것들이 머릿속을 채웁니다.
밖으로 나오면 아침 해를 이마에 붙입니다. 내 눈보다 많은 눈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봄은 눈 천지입니다. 매화 눈, 산수유 눈, 버들강아지 눈……. 주변을 넓혀갑니다. 이산 저산, 이들 저들, 아직도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정오의 햇살이 가슴을 포근하게 감쌉니다. 바다 끝 수평선에 걸친 태양이 저녁을 물들입니다. 짙은 노을 한 줄기가 바다를 가로질러 나에게 손짓합니다.
‘노란 카펫 위를 걸어 나에게 올 수 있겠어?’
내 눈은 왕자라도 된 양 재빨리 카펫 위에 수정 구슬을 굴리듯 수평선을 향해 달음박질합니다.
내가 계절을 안고 왔듯이, 세월은 나를 보듬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지금 ‘비발디의 사계’를 감상 중입니다. 오늘도 짧은 사이에 봄이 달려왔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옵니다.
‘그날이 그날이지 뭐, 그 계절이 그 계절이지 뭐.’
달라진 것 없어 보여도, 달라진 것이 있어 나는 그냥 바쁩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지난해에 비해 올해가 나아진 것 같아,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진 것 같아 살맛을 느낍니다. 희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세상과 교감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