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봄소식 20210408
요즈음은 밖에 나갈 때마다 날마다 달라지는 풍경에 어리둥절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발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둘러봅니다. 낯선 곳을 여행하는 기분입니다. 햇볕이라도 강하게 내리쬐면 화려한 색채에 눈이 어지럽기까지 합니다. 눈이 벚꽃으로 다가갔습니다. 나무 밑에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요술 궁전에라도 들어온 느낌입니다.
‘남에 손자라도 꾸어서 올 걸.’
꽃 잔치가 열렸습니다. 벚꽃뿐만 아니라 고만고만한 크기를 가진 앵두꽃, 매화꽃을 비롯하여 노란색을 지닌 산수유, 생강나무 등이 자태를 뽐냅니다. 어릴 때 그 흔하던 개나리와 진달래도 피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비 온 뒤 우후죽순 같다는 말처럼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자 정말로 대지가 얼굴을 바꿉니다. 땅에는 풀들이 너도나도 흙덩이를 헤치고 머리를 들어냈습니다. 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해 연초록으로 싹을 밀어냅니다.
라일락은 마음이 성급했나 봅니다. 오월의 꽃이라는데 사월이 되자마자 ‘까꿍’하고 보라색 꽃을 터뜨렸습니다. 올봄은 앞뒤를 가리지 않나 봅니다.
“왜 민들레는 보이지 않는 거야.”
보름 전까지만 해도 기다림에 지쳐 구시렁거렸습니다. 민들레는 이를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이틀이 지나자, 공원의 언덕바지를 노랗게 물들였습니다. 별꽃들도 앞을 다투어 주변을 물들였습니다. 밤인지 낮인지 상관하지 않는 투입니다.
‘진달래가 이산 저산을 물들이고, 울안의 개나리는 햇살에 흠뻑 취했나 봅니다.’
집배원이 건네준 안부의 편지 내용 중 첫머리의 문장입니다. 누가 보낸 편지인지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삼촌이 글을 모르는 할머니를 위해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글귀도 있습니다. 그 시절의 봄 편지 서문에 오르내리는 흔한 글귀였습니다. 맞습니다. 그때는 집마다 몇 개의 제비집이 있었습니다. 모두 바깥일을 위해 집을 비워도 마당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흥부네 박 씨처럼 금은보화를 가져온 양 지푸라기와 흙을 물어와 집을 지으며 한껏 떠들어댔습니다.
요즈음은 봄의 정취를 느껴보기 위해 고향을 방문하더라도 제비집은 고사하고 제비의 지저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온 산을 물들이던 그 붉은 진달래도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아직 떠나지 못한 것만이 어쩌다가 양지바른 산기슭에서 눈에 뜨입니다. 환경의 변화가 만들어 낸 일이라고 합니다.
진달래는 산림녹화로 큰 수목이 늘어나며 햇빛을 잘 받을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소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제비는 농약으로 인해 생태계가 오염되고 그들의 먹이가 줄어들자, 내 고향을 찾아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대지는 연두색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좀 지나면 초록색 옷으로 갈아입을 것입니다. 추운 겨울이 밀려났던 것처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봄은 꽃들을 마음속에 품은 채 여름에 등을 보이며 멀어지겠지요.
편지글도 바뀝니다.
‘녹음방초 우거진 이 계절에…….’
계절마다 찾아오는 할머니께 드리는 친척들의 안부 편지가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훔쳐본 것은 아니지만 ‘편지요’ 하는 집배원의 말에 누구보다도 먼저 사립문을 향해 줄달음질 쳤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장롱 서랍에 감추어 두고 삼촌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할머니, 편지 왔어요.”
나는 할머니의 여름 편지를 음미하기 전에 먼저 봄을 만끽해야겠습니다.
아침을 먹자, 아들의 출근 시간보다 앞서 슬그머니 배낭을 어깨에 걸쳤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 춘심처럼 봄바람이 났지.”
“잘 다녀오세요.”
“강남 갔던 제비도 볼 수 있으려는지……….”
뒷말을 간직한 채 천천히 집을 나섭니다. 어느새 햇볕이 버스정류장에서 손짓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