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은 7시간전

2021 그날

30. 땡땡이치기 좋은 날 20210409

앞산에 누가 흰점을 찍어놓았습니다. 그것도 큰 붓으로 뭉텅뭉텅, 뭉글뭉글 휘갈겼습니다. 글씨도 아니고 그림도 아닙니다. 꼬마 아이의 장난 같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제법 음영은 살렸습니다. 먼 곳에서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꽃망울이 방울방울 윤곽을 드러냅니다. 좀 더 가까이 갔습니다. 바람에 흩날린 벚꽃 잎이 바닥에 깔리기 시작합니다. 좀 지나자 흩어진 꽃잎들이 동그란 무늬를 이룹니다. 언젠가 유행했던 여인들의 옷을 떠올립니다.


‘땡땡이.’


다시 말하면 물방울무늬가 어울리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어원에 대해서야 잘 모르지만, 어느 글에서 보니 한자 점(點)의 일본식 음독에서 변했다고 합니다. ‘텐’이 ‘땡’이라고 발음하다 보니 접미사를 붙이게 되어 ‘땡땡이’가 됐습니다. 좀 더 음미해 보니 점이 여러 개 모이고 확대되어 물방울무늬로 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또 다른 생각을 떠올립니다. ‘땡땡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수업이나 작업 따위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놀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중학교 때의 일입니다. 첫 시간 수업이 끝났을 무렵입니다. 젊은 담임선생님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습니다. 상기된 표정입니다. 우리는 반에 또 다른 문제가 있나 하는 긴장감에 휩싸였습니다. 며칠 전에 두 친구가 심한 몸싸움으로 다친 일이 있었는데 아직도 해결의 기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단에서 잠시 어쩔 줄 몰라 발길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새내기 선생님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네. 등록금을 석 달이나 밀린 학생은 집으로 가야겠다. 부모님께 말씀드려 꼭 가지고, 와야 한다.”


이름이 불리자, 친구들이 하나둘씩 일어났습니다. 십여 명이나 됩니다. 학생들이 머뭇거리자, 선생님은 더 이상 눈을 마주칠 수 없었던지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습니다. 작년에도 세 번씩이나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도 그중 한 명입니다.


“등록금을 내기 싫어 안내나, 가난해서 못 내지.”


한 아이가 두런거리며 발을 옮기자, 남은 사람들도 하나둘 교실을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잠시 몸을 피할 곳은 남산입니다. 남산 꼭대기에 이르러 시내를 둘러보고 서로 떠들다 보면 제한된 시간에 교실에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돈이 금방 마련될 수 없다는 것을. 첫 번 교실에서 나왔을 때는 순진하게도 집으로 향했지만, 부모님 마음만 상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다음부터는 밖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개중에는 등록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친구도 이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공부하기가 싫었든지 아니면 학교에서 인정된 당분간의 자유로운 퇴출이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땡땡이.’


다음 수업 시간에 들어오는 선생님은 그동안의 상태를 미루어 보아 출석을 점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건너편 친구가 나를 따라붙었습니다.


“너는 아니잖아.”


“응, 교실이 답답해서 탈출하고 싶었어.”


우리는 골목길을 이리저리 밟으며 남산 정상에 이르렀습니다. 앞 단추를 두 개 풀었습니다. 후끈한 열기가 밖으로 달아납니다. 산은 헐벗었습니다. 군데군데 점을 찍듯 무더기를 이룬 나무들이 외롭게 자리를 지킵니다.

친구와는 사는 곳이 다르고 평소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심심한데 우리 가계 가보지 않을래?”


나는 친구를 따라 남대문 시장으로 갔습니다. 안경테 도매 상가입니다. 규모가 큽니다. 안경테를 둘러보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안경 필요하니?”


고개를 젓자, 나중에라도 안경이 필요하면 친구이니 싸게 주겠다며 내가 들여다보던 안경테를 코에 걸쳐 보입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왜 이리 일찍 왔느냐고 물어볼 사이도 없이 그는 말했습니다.


“송충이 잡으러 산에 갔다가 땡땡이쳤어요. 들키기 전에 인제 그만 가야지요.”


“모처럼 친구와 왔는데, 가다가 빵이라도 사 먹으렴.”


친구는 아버지가 내미는 손을 덥석 잡기라도 할 듯 지폐를 성큼 잡아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빵 봉지를 손에 들고 다시 남산을 오릅니다. 시내를 다시 둘러봅니다.


‘잘 살아야 하는데, 잘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정해준 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겼습니다. 담임선생님이 홀로 교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리 늦었어?”


“집이 멀어서요. 말죽거리예요.”


“너는.”


“부모님 기다리다가요.”


선생님의 얼굴은 처음처럼 고뇌에 찬 모습입니다. 우리도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교실의 뒷문을 닫았습니다.

땡땡, 땡땡이.


작가의 이전글 2021 그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