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그날
42. 유언이 없으면……. 20210424
“내가 이만하면 오래 살았지. 장지로 가기 전날 밤, 불을 밝히고 꽃상여 놀이를 해다오.”
친척, 친지를 비롯한 인근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횃불을 밝혔습니다. 자정이 넘도록 동네가 들썩들썩했습니다. 우리 할머니의 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수필 쓰기 공부 시간입니다. 선생님이 유언 쓰기의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유품에 관한 것과 묘비명의 내용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생각을 해본 것이지만 막상 책상 앞에 앉으니,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유언을 쓰기에 앞서서 죽음이 먼저 떠오릅니다. ‘생물의 목숨이 끊어지는 일’, 사전적 의미입니다. 나는 가끔 부고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할 때는 늘 몸과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낯섦 자체입니다. 내가 철이 든 이래 조모님, 부모님을 비롯하여 숙부 모, 형제, 친척들과 영원한 이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제자 한 명은 불의의 사고로 내 품 안에 안겨 눈을 감은 일도 있습니다. 멀리서 우연히 목격했습니다. 교통사고였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죽음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임종을 지켜보면서도 잘 가시라는 인사조차 변변히 못 했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과 이별했지만 저승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얼마나 멀고 험난한지, 또는 얼마나 가깝고 순탄한 길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할머니께 물어봤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이십여 년 전에 할머니는 건강 악화로 여러 날 비몽사몽 사경을 헤맨 일이 있습니다. 걱정되어 집안 식구들이 모였습니다. 모두 슬픔에 잠겼습니다.
다행입니다. 생전에 자식들의 효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할머니는 눈을 뜨셨고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저승사자를 따라갔는데 할아버지가 저승문에 있다가 되돌아가라고 자꾸만 손짓하더구나.”
“예?”
“더 있다 오라고 했는데 언제라고는 물어보지 못했네.”
그 후 할머니는 가끔 벽을 바라보며 혼잣말하셨습니다.
“언제인지 모르겠네. 언제였더라…….”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리자 ‘전설 따라 삼천리’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텔레비전의 흑백 화면입니다. 안개가 자욱이 내리는 깊은 밤, 저승사자가 찾아와 망자를 재촉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처럼 망자는 저승의 문턱에서 돌아섭니다. 저승사자가 착각하여 다른 사람을 데려간 것입니다. 이승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신의 육신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혼령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니 이후의 이야기는 상상에 맡깁니다.
내 말을 해야겠습니다. 사후에는 나의 흔적이 남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유명해서도 아니고 세상에 손가락질받을 만한 일을 해서도 아닙니다. 인생의 끝은 결국 소멸하는 것이고 보니 그림자조차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유품이라고요, 생각해 놓은 것이 하나 있지만 미련은 두지 않겠습니다. 가정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써온 글들이 책으로 엮어질 수 있다면 이것만큼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동안 많이 읽고 나름대로 열심히 써보았습니다. 없애기에는 왠지 미련이 갑니다. 잘 쓴 글인지 아닌지는 독자들의 몫이고 보면 한 권 정도는 어떨지요. (수필 한 권, 시집 한 권, 동시 한 권, 동화 한 권) 남겨 놓는다고는 해도 후세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지면 스스로 소멸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글을 엮어내지만 잠시 세상에 모습을 보이다가 사라집니다. 숨을 이어가는 책들은 그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고전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길이길이 후세 사람들과의 대화가 이어질 수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묘비명이라고요. 없습니다. 나는 죽은 자가 산자를 위해 양보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자체만큼이나 고결한 것이지만 저승으로 가는 이상 이승의 후세들에게 짐이 되기는 싫습니다. 예로부터 장례 시 조장이나 풍장, 화장, 매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매장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화장하는 비율이 훨씬 높습니다.
나는 요, 화장입니다. 선산 중에 나에게 배정된 자리에는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선산은 집안 가족의 쉼터가 되면 좋겠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내와 자식에게 오래전부터 말해왔습니다.
“죽으면 화장해서 가까운 산천에 뿌려요. 바다에 뿌려도 돼요.”
말을 꺼낼 때마다 식구들은 침묵입니다.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인지 모릅니다. 한편 죽음이란 단어 자체가 어색하게 다가오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이란 우리 할머니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날짜를 정해놓은 것은 아닙니다. 태어남은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누구나 오늘이 그날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 가진 게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습니다. 태어날 때처럼 갈 때도 빈손인 줄을 압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저승에서는 뇌물이 통하지 않는가 봅니다. 업경대(業鏡臺)가 있어서 어쩔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그렇다고 뭐 남길 것이나 있습니까. 급할 때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정도의 예비비 정도만 있으면 족합니다.
마지막 기도를 합니다. 합장합니다.
‘그날이 그날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