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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Nov 22. 2024

2021 그날

51. 자동차는 새장이다. 20210514

‘새를 사랑한 새장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선호합니다. 그보다는 걷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내가 운전을 싫어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내 시선이 좁아지는데 원인이 있습니다. 주변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운전을 그만둔 지 이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남의 차를 타는 것을 거부하지 않지만, 운전대를 잡는 것은 싫어합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제때 볼 수 없고 생각도 온전히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 보고, 또 정확히 보려면 천천히 가고 때로는 멈춰야 합니다.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걸을 때는 내가 멈추고 싶은 곳에서 쉽게 멈출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즈음 우리 동네 길가의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떡을 하려고 물에 담갔다가 막 건져 올린 떡쌀 생각이 듭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봅니다. 꽃잎이 바닥에 떨어져 쌓인 것이 꼭 거친 쌀가루 같아 보입니다. 갑자기 침이 넘어갑니다. 입맛을 다십니다. 쑥개떡 생각이 나기도 하고 쑥버무리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나는 그 향기를 반깁니다. 운전석에 앉아 이것저것 신경을 쓰다 보면 뭐 이런 모습을 보거나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휙 지나치고 난 다음 궁금해서 생각해 보면 이팝나무의 꽃은 그저 흰 구름 덩이였을 뿐입니다. 애써 상황을 연출해 본다면 제멋대로 생긴 흰무리의 덩입니다.


강의 시간에 누군가 말했습니다. 평소에 나처럼 운전에 대한 느낌이 좋지 않았던지 이야기에 동조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장롱 면허가 되었어요.”


운전에 자신감이 없고 불안한 생각이 들어 운전할 수가 없었답니다. 나도 그분의 말에 일정 부분 공감이 됩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종종 불안감도 있었습니다. 내가 운전하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없었습니다. 먼 거리를 빨리 가겠다고 차를 몰고 갔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한 때보다 시간이 더 지체되었습니다. 낯선 목적지를 찾아갈 때 더더욱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좀 편하게 하자고 산 차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내 보살핌이 없다면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젖먹이고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고 때로는 예방 주사를 맞혀야 하는 아기에 비유됩니다. 내가 엄마 된 느낌입니다. 기름 넣고 세차하고 수시로 이상이 없나 점검해야 합니다.


집 근처나 공원에서 개를 보며 떠올리는 생각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반려견이라며 애지중지하는 애완견을 볼 때입니다. 저럴 거면 아이 하나 더 낳아 기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그들의 행동을 살펴봅니다. 신생아의 출산이 줄어 걱정이라고 하는 이때, 그 정성이면 자식 하나 더 건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애완견 요, 그들은 새들과 같은 생각일 겁니다. 주인은 개가 예쁘다고 귀엽다고 옷을 입히고 미용에 신경을 써줍니다. 먹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은 태도를 바꿔 놓고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정작 개들이 미용이나 옷을 좋아하는지 말입니다. 나 좋다고 하는 일입니다. 새장에 갇힌 새와 뭐 다르겠습니까.


주인의 생각에는 운동시킨다, 산책시킨다고 하며 밖으로 나왔지만 정말 개를 위한 것인지는 아리송합니다. 목줄에 매달려 주인의 마음먹은 발길을 따라 활동해야만 합니다. 반려견, 반려견 하지만 가식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리는 경우입니다. 어느새 반려견이 유기견으로 변했습니다.


나는 강의 시간에 가끔 주제와는 다소 동떨어진 곳으로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토의해야 할 때 미안함이 앞섭니다. 의제에 맞는 내용을 콕 집어 말해야 하는데 뜬금없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냐고 때 늦은 후회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등장하는 새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내 발이 도서관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자동차는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똑똑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을 안락함으로 이끌기 위한 배려일지 모릅니다. 눈을 달아주었습니다. 생각을 달아주었습니다. 배고픔도 알려줍니다. 엄마가 정성을 다해 자식을 보살피듯 합니다.


자동차가 나에게 손짓합니다. 새장처럼 말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합니다. 자율주행을 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방방곡곡 소문을 냅니다.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돼.’


고맙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오로지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싶습니다. 나는 아직도 원숭이의 꽃신을 신고 있는지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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