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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Nov 24. 2024

2021 그날

64. 오월의 향기 20210608

오월은 여왕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파란 하늘, 아카시의 그윽한 향기, 물감을 풀어놓은 연두색의 신록, 자연의 빛 못지않은 가정의 아름다운 정서가 깃든 달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비롯한 스승의 날, 나는 여왕의 계절이라기보다는 향기의 달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오늘 오전에는 볼일이 있어서 노인회관에 들렀다가 올 때는 집을 향해 걸었습니다. 어제와는 달리 화창한 날씨입니다. 조금 더운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발걸음이 느려지고 멈춤이 많아지다 보니 이쯤이야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걸음이 정지된 이유는 꽃 때문입니다. 회관에서 집으로 오는 길 위에는 공원이 있습니다. 몇 군데의 건널목을 건너기만 하면 공원에서 공원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합니다. 자연미가 없다고는 하지만 정돈되고 절제된 도시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데는 한몫을 합니다.


나는 꽃 이름을 잘 모릅니다. 시골에서 자라서 자연의 꽃 이름은 알고 있지만 외국에서 들여온 꽃은 영어의 낱말만큼이나 친근하지 못합니다. 이름이 길어서인지 생소한 발음이라서 그런지는 모릅니다. 둘 다 나를 바보로 만듭니다. 이름을 모르니 그 이름을 불러줄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랑꽃, 파랑꽃, 빨강꽃, 흰꽃, 알록달록한 꽃들은 무더기로 나를 반기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에 나풀거립니다.


한껏 자태를 뽐내는데 그냥 모른 채 지나칠 수야 있겠습니까.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습니다. 눈에 드는 꽃들에 미소를 보내며 ‘찰칵’ 최대한 예쁘게 찍으려고 몸을 움직였습니다.



빨강꽃에게 다가갔습니다.


‘너, 참 귀엽다.


같이 있어 더 귀엽다.’



노랑꽃에게 다가갔습니다.


‘너 참 예쁘다.


같이 있어 더 예쁘다.’



꽃무리 속에 둘러싸였습니다.


노랑꽃, 빨강꽃, 하양꽃, 보라꽃


한데 어울려 더 아름답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꽃 이름 대신


귀엽다


예쁘다


아름답다


인사를 건넸습니다.



지나가는 바람에게 속삭였습니다.


잠시 멈추어주면 안 될까.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오월의 노래 속에는 라일락 향기가 있습니다. 유월의 장미도 있습니다. 해마다 기온이 상승해서일까요. 요즘은 오월에도 장미꽃이 만발합니다. 나는 장미의 향기도 라일락의 향기도 좋아합니다. 아카시 향기를 좋아합니다.


시골 태생인지는 몰라도 아카시 냄새를 더 반가워합니다. 아카시는 장미만큼이나 가시가 억세지만, 친근감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입니다. 장미나 라일락의 이름은 알아도 실물은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아카시는 늘 내 주위에 있었습니다. 집 울타리에도, 산기슭에도, 학교로 오가는 길목에서도 늘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카시는 가끔 나를 찔러 살갗을 아프고 아리게 했지만 탓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다가가지 않는다면 이들은 장미처럼 나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아카시꽃이 피는 시기가 돌아오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늦어집니다.


아카시꽃이 피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의 향내를 떠올립니다. 새 연필을 깎을 때입니다. 내 것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새 연필에서도 같은 냄새가 납니다.


“향나무 연필이 아니야?”


나는 향내를 알고 있습니다. 제사 때 향불을 피우기 위해 어른들은 동네에서 제일 좋은 향나무 가지를 구해 말리고는 연필을 깎듯 나무를 깎습니다. 화선지에 고이 싸두었다가 제삿날 향로에 연기를 피워 올립니다. 향내가 방안을 가득 채웁니다.


아카시아가 만발했습니다. 큰 아카시나무 밑에 들어서면 향기가 나를 감쌉니다. 장미와 라일락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꿀을 모으려는 벌들의 소리가 귓전에 울립니다. 우리는 가끔 싱싱한 꽃줄기를 꺾어 입 안에 넣고 ‘주룩’ 줄기만 빼냅니다. 향기가 입안에 가득 차다 못해 분수처럼 코를 향해 뿜어져 나옵니다. 할머니는 아카시꽃 튀김이나 꽃밥을 해주십니다. 솥을 여는 순간 ‘푹’하는 김과 함께 향이 얼굴을 감쌉니다.


중학교 앞을 지나치다 보니 자그마한 아카시 한 그루가 울타리에 기대어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지만, 기대한 만큼의 향기는 없습니다. 음지라서 일까요. 아직 꽃잎을 활짝 펼치지 못했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수변공원의 아카시아밭으로 가야겠습니다.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노니는 곳이니 꽃이 한창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숨을 크게 들이쉽니다. 향기가 가슴 가득 채워지는 느낌입니다.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오월은 향기의 계절임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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